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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리끼리 강의 듣고 치맥...요즘 586세대 '유쾌한 작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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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네오사피엔스 NeoSapiens | 100세 시대가 일으킨 지식공유 열풍

[김동호 논설위원이 간다] #친구들 사이 재능기부로 무료 강연 #고급 CEO과정 뺨치는 콘텐트 즐비 #다양한 경험 전해듣고 시야 넓어져 #각 분야 직업 통해 인생 대리 체험 #586세대 자발적 평생교육 본격화 #통찰 얻고 이모작 실패 줄이는 기회

쉰을 넘어서면서 다시 모여든 586세대의 지식공유 포럼은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공유한다. 윤영원 연세대 강남세브란스병원 교수가 친구들에게 강의하고 있다. 김동호 기자

쉰을 넘어서면서 다시 모여든 586세대의 지식공유 포럼은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공유한다. 윤영원 연세대 강남세브란스병원 교수가 친구들에게 강의하고 있다. 김동호 기자

100세 시대의 또 다른 특징은 ‘자발적 평생교육’이다. 한 직장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은 깊지만 좁다. 산업혁명 이후 끊임없는 전문화의 결과다. 이런 산업구조에서는 자신이 속해 있는 분야에서 전문성이 있어야 대접을 받을 수 있다. 모든 것을 조금씩 알고 있는 제너럴리스트는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지만 특정 분야를 깊게 아는 스페셜리스트는 쉽게 대체되지 않는다. 하지만 직장 밖으로 나오면 자신의 좁은 전문성은 무용지물이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100세 시대의 ‘네오 사피엔스’는 다른 업종과 다른 세계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시야를 넓혀나갈 필요가 있다. 그래야 노후에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이나 전직 기회도 찾기 쉽다. 586세대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지식공유 품앗이 세계로 들어가 봤다.

가을 단풍으로 물들기 시작한 지난달 18일 서울시청 앞 한 강의장. 오후 7시가 임박하자 막 퇴근한 중년 남녀들이 한둘씩 모여들었다. 서로 초면도 많았다. 하지만 즉석에서 자신을 소개한 이들은 금세 오랜 친구처럼 말을 놓고 수다를 떨었다. 그러면서 미리 준비된 김밥ㆍ음료로 간단한 요기를 끝내자 바로 강연이 시작됐다. 강연자는 윤영원 연세대학교 강남세브란스병원 진료협력센터소장 겸 심장내과 교수였다. 참석자들은 강의가 시작되자 눈을 반짝였다. 바로 자신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질환이 눈앞에 펼쳐져서다.

 전문용어가 많았지만 쉬운 말로 심장질환을 설명해나갔다. “동맥경화는 정확하게 말하면 ‘죽상경화’라고 해야 한다. 혈관 내부에 콜레스테롤이 쌓이면서 죽처럼 엉겨 붙어 혈관이 좁아지는 현상이다. 반면 동맥경화는 동맥 자체의 탄력이 감소하고 석회화가 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윤 교수는 예방법도 자세히 소개했다. “나쁜 콜레스테롤인 ‘LDL’이 쌓이지 않아야 한다. 그러려면 꾸준하게 운동해 피의 순환을 촉진시켜라. 무엇보다 내장 비만은 좋지 않다. 흡연 역시 혈관을 수축시킨다는 점에서 피해야 한다. 고지혈 진단을 받으면 약을 복용하는 게 좋다.”

몸속 동맥 혈관이 좁아진 모습을 낡은 수도관에 비유해 설명하고 있다. 김동호 기자

몸속 동맥 혈관이 좁아진 모습을 낡은 수도관에 비유해 설명하고 있다. 김동호 기자

온몸에 혈액을 공급하는 심장의 기능을 설명하고 있다. 김동호 기자

온몸에 혈액을 공급하는 심장의 기능을 설명하고 있다. 김동호 기자

 이날 강연은 유익하고 알찼지만 무료였다. 참가자들이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털어놓은 재능기부 방식이라서다. 강연은 매달 한 차례 진행된다. 그간 55회 열린 이 모임을 통해 한의사, 돼지농장 사장, 마케팅 전문가, 출판전문가, 심리상담가, 교수 등 다양한 직업군의 강의가 진행됐다.

 이미 인생이모작에 성공한 사례도 있었다. 파생상품전문가에서 대규모 돼지 농장 경영자로 변신한 이도헌 성우농장 대표가 그런 경우다. 『나는 돼지농장으로 출근한다』를 펴내기도 한 그는 43세 되던 2010년 금융업에서는 개인의 미래를 더 찾을 수 없다고 보고 양돈 사업에 참여했다. 처음엔 돼짓값 폭락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3년 만에 경영을 정상화하면서 50억원 매출에 7억원의 순이익 사업으로 키워냈다. 인생이모작으로 창업을 꿈꾸는 이들에게 귀중한 정보가 된 강연이었다.

 경제학을 전공한 뒤 한의대에 다시 들어가 늦깎이 한의사가 된 강신옥씨의 강의도 인기를 끌었다. 강씨는 한방과 양방의 차이를 소개하면서 “몸이 차가워지는 부인 질환은 한방 효과가 크다”고 조언했다. “부황이 나쁜 피를 뽑아내는 게 아니라 혈(血)을 뚫어 안 좋은 부위를 자극함으로써 치료하는 것”이라는 설명에도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만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내 인생 다섯 번의 실패’를 주제로 강연한 경우도 있었다. 50년 세월 넘긴 인생 자체가 이들을 명강사로 만든 것이다.

한의학 강의는 여성 참가자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김동호 기자

한의학 강의는 여성 참가자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김동호 기자

 그런데 참가자 대다수가 평소 모르고 지내던 이들이 자발적으로 만나 서로 경험·지식을 공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 스탠퍼드대 마크 그라노베터 교수는 1973년 발표한 논문 ‘약한 연결의 힘’(The Strength of Weak Ties)에서 “사람들은 가깝게 지내는 사람(강한 연결)보다는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들(약한 연결)로부터 정보를 얻고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다“고 주장했다. 직장을 소개받거나, 새로운 정보를 습득할 때 주변의 사람들보다는 아주 가끔 연락하는 지인들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더 많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생이 길어지면서 평소 몰랐던 이들과의 지식공유 품앗이가 활성화하는 이유다.

 이 모임 임은희 회장은 “각 분야의 경험과 전문성을 가진 친구들을 통해 배우고 간접 경험하면서 우리 사회의 맥락과 경제의 흐름을 짚어볼 수 있다”고 말했다. 거의 매달 포럼에 참여하고 있다는 박상두 두앤북 대표는 “퇴직해도 30년에 이르는 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지 지혜를 나누고 인생이모작의 실패를 줄일 수 있는 통찰과 소통의 기회가 되고 있다”고 봤다.

 한국에서 이 같은 사회적 지식공유는 전에 볼 수 없던 현상이다. 이런 모임을 주도하는 세대는 586세대가 처음이다. 이들은 지금 막내 격인 88학번(69년생)까지 모두 50대로 진입했다. 한국 처음으로 고등교육이 보편화된 지식정보화 시대에 직장을 다니고 퇴직 후 30년을 살아가야 하는 100세 시대의 ‘네오 사피엔스’들이다.

 이들과 앞세대를 가르는 결정적 차이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활용이다. 수백 명 단위의 대규모 집단이 정보를 교환하고 모임을 공지하기 쉬운 밴드는 유용한 소통 수단이다. 지식공유포럼의 경우도 ‘정모’는 물론 번개팅이 모두 밴드를 통해 이뤄진다. 언제든 생각이 나면 밴드에 들어가 공지를 읽고 참여할지 말지를 판단하면 된다.

강연 뒤에는 뒤풀이가 이어진다. 한 참석자는 “강연도 좋지만 뒤풀이가 더 기다려진다”고 말했다. 뒤풀이 비용은 강연 전 김밥값과 합쳐 2만원을 걷는다. 더구나 불참할 때는 내지 않는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번 사람이 있어도 수평적인 자연인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비용을 함께 부담한다. 어차피 돈이 크게 들 일도 없다. 나이가 쉰을 넘었지만 피자 한 조각에 치맥이면 충분해서다.

지식공유 포럼 참가자들이 강연 후 기념촬영하고 있다. 참석자는 매회 20명 안팎이다. 김동호 기자

지식공유 포럼 참가자들이 강연 후 기념촬영하고 있다. 참석자는 매회 20명 안팎이다. 김동호 기자

 무엇보다 뒤풀이에서는 다양한 만남이 이뤄진다. 강연의 질의응답이 이어지기도 하지만 서로 다른 분야에 대한 정보와 경험을 공유한다. 재학 중에는 같은 과에서 몰려다녔지만 이곳에서 과는 의미가 없다. 인문계ㆍ이공계ㆍ예체능계가 모두 함께 어우러진다. 무대에서만 보던 프리마돈나가 바로 옆에 앉아 있는 경우도 있다. 성악을 전공한 한 참가자는 “요즘은 일 다음으로 중요한 일상이 커뮤니티에 나와 다양한 모임에 참여하고 세상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모임에 꾸준히 참석하는 김재웅씨는 “일상적으로는 들을 수 없는 다양하고 심층적인 이야기를 같은 세대가 모여 공유할 수 있어서 만족도가 더 크다”고 말했다. 지난 회<본지 10월 18일자 28면> ‘직장에선 일만 하고, 여가는 커뮤니티에서 보낸다’에서 살펴본 것처럼 100세 시대의 커뮤니티는 레저 활동뿐만 아니라 세상을 넓게 보는 지식공유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웬만한 대학 최고경영자(CEO)과정보다 생생하고 실질적인 자리가 되고 있다는 얘기다. 앞 세대가 경험하지 못했던 SNS의 등장과 100세 시대가 바꾸어 놓은 지식정보사회의 새로운 단면이다.

▶절찬 연재중 ‘네오사피엔스 NeoSapiens’계속 읽기

①100세 시대의 네오사피엔스는 계속 일하고 싶다

②꼰대 아닌 지식정보형 중장년은 도서관으로 간다

③지하철의 달콤한 인생환승…퇴직자들 돌아온다

④청년 돕는 퇴직자의 블루오션 '제4섹터'가 뜬다

⑤직장에선 일만 하고 여가는 커뮤니티에서 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