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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논설위원이 간다

100세 시대의 ‘네오 사피엔스’는 계속 일하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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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김동호의 네오 사피엔스

100세 시대 신인류 ‘네오 사피엔스’ #과거 세대와 달리 퇴직해도 일해야 #능력 발휘하고 싶지만 기회 드물어 #기존 지식ㆍ학력은 별로 쓸모 없어 #스스로 자기 혁신해 미래 준비하고 #국가는 퇴직자 활용 기회 제공해야

1950년대 중반에 태어난 베이비부머(1955~63년 출생)의 퇴직이 한창이다. 법정정년 60세 연장으로 퇴직 쓰나미가 주춤하고 있지만 그 흐름이 멈춘 것은 아니다. 55년~57년생은 이미 퇴직했고, 올해는 베이비부머의 상징격인 58년 개띠들이 환갑을 맞아 줄줄이 회사 밖으로 쏟아지고 있다. 퇴직 문턱을 넘어선 이들은 100세 시대의 문으로 들어서고 있다. 앞 세대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30년 이상 펼쳐지는 인생후반전에서 일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이들을 ‘네오 사피엔스’라고 구분한다. 마침 ‘중장년 채용박람회’에 일본 기업들이 참여하면서 그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서울 강남구 코엑스 '중장년 전문인력 채용박람회'를 찾은 사람들이 면접 서류를 작성하고 있다. 김동호 기자

서울 강남구 코엑스 '중장년 전문인력 채용박람회'를 찾은 사람들이 면접 서류를 작성하고 있다. 김동호 기자

더위가 본격화된 지난달 20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 가는 길 내내 후텁지근하더니 행사장이 코엑스 내 외진 곳에 있어 더위를 부채질했다. 이 길을 걷는 구직자들의 마음을 생각하니 발길은 더욱 무거워졌다. 에스컬레이터를 몇 차례 갈아타고 3층 행사장에 도착하자 구직자 등록카드를 적는 구역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그곳을 지나 면접장으로 들어가봤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장년들이 기업별 부스마다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20대 신입사원들이 서 있어야 할 자리에 평균 60대 안팎의 중장년들이 굳게 입을 다문 채 긴장한 모습으로 면접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라리 30년대 미국 대공황 시절 길게 늘어선 구직 행렬을 떠올리게 했다. “마음이 짠하다”(김영희 무역협회 일자리센터장)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었다.
취재하기도 미안해 말을 못붙이고 있는데 구직자 한 명이 귀동냥이라도 할까 싶어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는 59년생으로 20년 넘게 영어 학원을 해왔는데 학생이 줄어 잘 안 되는 바람에 몇해 전 접고 지금은 대학 강사를 하고 있다. 소득은 100만원이 조금 넘는다고 했다. 문제는 결혼이 늦어 지금도 대학생인 두 자녀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득이 불안한 강사를 접고 일본 기업에 취업할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이곳을 찾았다.
그가 문을 두드린 곳은 일본에서 물류업을 하는 국제익스프레스였다. 한국인 사장이 창업해 종업원 150명에 연매출 600억원인 중소기업이다. 이 회사 나승도 사장을 통해 ^베이비부머들의 구직이 얼마나 절실한지 ^한국과 일본의 취업 여건이 얼마나 다른지를 비롯해 이 시대 중장년들이 치르고 있는 취업전쟁의 단면을 생생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재취업 전선에 뛰어든 중장년들이 자신에게 적합한 취업 정보를 확인하고 있다. 김동호 기자

재취업 전선에 뛰어든 중장년들이 자신에게 적합한 취업 정보를 확인하고 있다. 김동호 기자

-몇명이나 뽑을 건가.
“약 150명이 면접 부스를 다녀갔다. 심층 면접을 거쳐 2명을 뽑을 계획이다.”
-경쟁률이 75대 1 아닌가. 그 중에 적합한 사람들이 왔나.
“너무 놀랐다. 삼성ㆍ현대ㆍLG그룹 출신 임원과 부장급 퇴직자들도 여럿 지원했다. 박사급까지 있어 놀랄만큼 고학력이고, 유능한 관리직 출신들이었다.”
-나이는 어떻게 되나.
“주로 60대였고, 70대 중후반도 응시했다. 외국계 유명 IT기업 출신의 71세 지원자도 있었는데 ‘나, 뭐든지 할 수 있다’면서 뽑아달라고 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한국에서 중장년을 찾는 이유도 물었다. 일본은 사람을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력 부족 사태를 겪고 있다지만 그래도 한국까지 건너와 중장년을 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는 “일본에는 청년도 구하기 어렵지만, 전문직과 관리직에서 중장년이 많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은 일할 사람이 없어 폐업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을 정도다. 최근에는 일본 대기업들도 중소기업들만 참가하던 채용 박람회에 끼어들어 인재전쟁에 나선다는 것이다. 나 사장 회사는 아예 정년을 없앴다. “나이 관계 없이 평생 퇴직 없이 일하도록 사내 규정을 바꿨다.” 그가 사람을 찾으려고 한국까지 온 배경이다.
다만 조건이 있다. 우선 “경험과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학력은 별 도움이 되지 않아 보였다. 부스를 설치한 기업들의 팜플렛을 봤더니 ‘학력 무관’이 상당수였다. 고학력 시대에 필요한 것은 학력이 아니라 경험과 능력이 뒷받침되는 실력이었다. 박원태 성경시스템 사장에게 중장년을 찾는 이유를 물었더니 “기술력이 축적돼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나이도 이미 파괴되고 있었다. 해양 토목 전문기업인 은성오엔씨는 홍콩에 파견될 프로젝트 매니저를 찾고 있었는데 “나이에 따로 제한이 있는 건 아니다”고 말했다.
결국 전문성이 관건이라는 얘기였는데 외국어는 재취업에 상당히 도움이 되는 것으로 보였다. 글로벌 시대가 되면서 해외영업이 많아지면서다. 물론 영어ㆍ일본어ㆍ중국어 가능자를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국과의 무역이 많은 나라 ‘톱3 국가’의 언어들이다.
이날 박람회를 찾은 중장년은 1500명에 달했다. 명찰을 1000개 준비했지만 지원자들이 밀려드는 바람에 명찰이 즉석에서 만들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상당수는 어깨를 떨구고 돌아섰을 가능성이 크다. 경력을 내세우고 있지만 기존 직장에서 쓰던 기술과 지식은 퇴직하면 쓸모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김대일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평소 사회 변화에 맞춰 기술과 지식을 업그레이드했다면 재취업 기회가 있겠지만 정년 제도에 안주하다 보면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 노력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대공황 탈출의 해법을 제시했던 존 메이너드 케인스 역시 “기술적 실업이 재취업의 장애물”이라고 지적했었다.

국내에서는 기회가 많지 않아 일본 기업에 지원하려는 중장년도 늘어나고 있다. 김동호 기자

국내에서는 기회가 많지 않아 일본 기업에 지원하려는 중장년도 늘어나고 있다. 김동호 기자

최근 내부 사정에 대해 얘기를 들을 수 있었던 은행이나 철도 산업도 이 같은 지적을 뒷받침한다. 위성호 신한은행장은 “젊고 업무능력이 있어도 지점장을 지내면 명예퇴직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그냥 연금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자영업은 ‘퇴직자들의 무덤’이라는 선배들의 경험이 학습효과를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은행에서는 기업금융 사후관리에 이들을 활용하면 현역 대비 3분의 1의 연봉을 주고 업무의 질을 높일 수 있다. 현재 400명을 채용하고 있는데 지금도 계속 인원을 늘리고 있다”고 했다.
서울 지하철 1~8호선을 운영하는 서울교통공사는 한 해 600명의 퇴직자를 쏟아낸다. 이들은 지난해 도시철도협동조합을 만들어 경험과 지식을 활용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정연수 이사장은 “급속한 기술 발전으로 인한 4차 산업혁명이 고령화와 맞물려 일자리가 사라지고 노후 생활을 불안하게 있다”면서 “현역 시절 익힌 기술을 활용해 철도 안전과 보수 분야에서 늘어나는 업무 수요를 도와주는 역할을 하겠다”고 자처하고 나섰다.

2명 선발에 150명이 지원한 국제익스프레스 부스에서 면접이 진행되고 있다. 김동호 기자

2명 선발에 150명이 지원한 국제익스프레스 부스에서 면접이 진행되고 있다. 김동호 기자

결국 100세 시대를 맞이한 사람들은 퇴직해도 일해야 하는 새로운 인류, ‘네오 사피엔스’가 되고 있다. 법정정년을 채우고 퇴직해도 생활비를 마련하거나 소일거리를 위해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하지만 평생 한 직장에서 일한 이들이 다른 일을 찾기는 쉽지 않다. 신한은행과 도시철도협동조합 사례처럼 이들에 대한 조직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정부가 ‘아웃 플레이스먼트’를 비롯해 퇴직자 지원 프로그램 활성화에 적극 나서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