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의회 '2 -가' 묻지마 당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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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부산 지역의 한 기초단체장 당선자가 용두산공원에서 노인들에게 큰절을 하며 당선사례를 하고 있다. 부산=송봉근 기자

'조상을 잘 두면 지방의원에 쉽게 당선된다?'

충남 서천군의원 선거에 출마한 강신훈 후보는 성(姓) 덕을 톡톡히 봤다고 스스로 인정한다. 복수 공천받은 같은 정당(열린우리당) 소속 네 명의 후보 중 성씨가 '가나다…' 순서에서 가장 앞선다는 이유로 '1-가' 기호를 배정받은 그는 후보 21명 중 득표율 12.3%로 1위를 차지했다. 반면 박씨 성을 가진 '1-나' 후보는 선거운동을 열심히 했는데도 4.4%를 얻어 낙선했다.

강 당선자는 "연고가 전혀 없는 다른 마을에서도 다른 후보들보다 40~50표씩 더 얻은 것으로 볼 때 기호 덕을 본 것 같다"고 말했다.

'1-나' 기호를 배정받아 서울 중랑구의회 5선(選)에 도전한 성백진 후보는 고배를 마셨다. 그는 "기호가 나빠 '1-가' 후보에 비해 득표율이 4.1%포인트 뒤졌다"고 억울해했다. 그는 최근 "현행 기초의원 기호 배정 방식이 국민의 평등권을 침해한다"며 헌법소원을 낸 바 있다.

기초의원 후보들의 기호 배정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여론이 높다. 이번 지방선거부터 선거구당 2~4명을 뽑는 중선거구제가 도입된 데다 정당공천제가 허용되면서 각 정당이 후보를 복수 공천하자 유권자들이 '가' 기호를 무조건 찍는 '묻지마 투표' 현상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 행운을 불러오는 '가' 기호=한나라당은 대전 시내 22개 선거구 가운데 21개 선거구에 복수 후보를 내 '가' 기호 후보를 모두 당선시켰다. 대전지역은 같은 정당에서 두 명 이상의 후보가 나서 당선된 37명 가운데 '가' 후보가 67%(25명)였다.

서울 시내 162개 선거구 중 '2-가' 기호를 배정받은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되지 못한 곳은 성북 '마'선거구 한 곳뿐이다. 서울지역 열린우리당 후보 190명 가운데 '나' '다' 기호의 후보가 '가' 기호의 후보보다 높은 득표를 한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서울지역 한 기초의원 후보는 "한나라당 공천을 받은 강.김씨 등은 거의 당선되고 허.홍씨 등은 상당수 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대구 중구 '가'선거구의 경우 한나라당 후보 세 명 중 박문일(29.1%), 설동길(16.1%), 임인환(14.9%) 후보 순으로 표를 많이 얻었으며 경기도 내 31개 시.군에서 한나라당 소속 '가' 후보는 모두 당선됐다.

중앙선관위에 따르면 이번 기초의원 지역구 당선자 2513명 가운데 '가' 기호로 당선된 후보는 1057명으로 '나.다.라' 기호로 당선된 후보를 모두 합한 것(841명)보다 25%나 더 많았다.

◆ "대책 마련해야"=대구 북구 '마'선거구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이차수(48)씨는 "유권자들이 후보 경력 등은 아예 보지도 않고 당만 보고 찍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정당공천제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앙선관위 문병길 공보계장은 "당초 이런 문제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결과는 더 심각한 것 같다"며 "기호 배정 문제를 포함해 이번 선거에서 드러난 제도상의 문제를 개정해 주도록 국회에 건의하겠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서울시 선대본부장인 박진 의원은 "국회에서 '가' '나' '다' 기호의 부당성을 보완하는 방법을 내놓을 것"이라고 밝혔다.

황선윤.김방현 기자 <kbhkk@joongang.co.kr>
사진=송봉근 기자 <bks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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