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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극 칼럼] 외칠 때와 잠잠할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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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나라가 다시 한번 시끄럽게 생겼다. 이라크 파병을 놓고 찬반으로 갈라져 또 얼마나 소란할 것인가. 이번 일은 좀 잠잠히 넘어 갔으면 좋겠다.

새 정부 들어 얼마나 어수선했는가. 전교조 파동, 화물연대 소동, 갯벌 살리자며 3보 1배, 위도 원전수거물 관리시설(원전센터) 반대, 노조 파업 등 하루도 평온한 날이 없었다. 이렇게 매일매일이 투쟁과 반대이니 일은 언제 할 것인가.

*** 참여의 홍수에 빠진 참여정부

이 정부가 참여정부라서 그런지 우리는 지금 참여의 풍요 속에 살고 있다. 참여란 좋은 것이다.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여의 기회를, 참여의 폭을 넓힌다는 데 누구도 반대하기 어렵다. 또 우리는 참여가 만들어낸 민주화라는 역사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참여'라는 단어에는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권위가 붙어 있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노선이 확정돼 공사 중이던 경부고속철이, 북한산 관통도로가 자연훼손이라는 명분을 내건 '참여' 때문에 공사가 중단돼 수백억원의 공사비를 낭비했다.

위도 원전센터도 원점에서 재검토한다고 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우리의 상황은 참여의 풍요를 넘어 참여의 홍수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여러 사람이 참여함으로써 잘 될 일이 있고, 전문가에게 맡겨 그들의 판단을 존중해야 할 일도 있다. 권력남용을 감시하거나 부정부패를 감시하는 일은 많은 사람의 참여가 효과적이다.

그러나 고도의 전문성과 종합적인 판단을 요하는 문제는 관련 전문가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다. 백 사람이 오답을 정답이라고 우긴다 하여 그것이 정답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정부 전횡이, 전문가 일방주의가 문제였다면 이 시대의 문제는 그 반대로 무슨 일이든 사람의 머릿수로, 집단의 힘으로 결정하려는 데 있다. 시민단체는 갯벌에서부터 원자력.교육, 심지어 대법관 선정까지도 자신들의 주문을 내놓는다.

사안이 큰 일 같으면 몇백개 시민단체가 공동으로 일을 벌이기도 한다. 시민단체의 이런 전방위 간섭에 대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어떻게 일상생활을 하는 보통사람이, 신부가, 스님이 모든 일에 통달하여 매사에 의견을 낼 수 있는가. 우리는 좀더 겸손해 져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상식(Common Sense)을 믿는 사람이다. 비록 전문지식은 없더라도 무엇이 상식에 맞는가를 판단하면 큰 실수를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회인가. 지금 이 사회에서 제기되는 이슈들이 어떻게 판단되고 있는가를 살펴보라.

우리는 너무나 이데올로기적인 판단에 익숙해 있다. 남북 문제만이 아니다. 모든 이슈마다 그 사람이 좌파 성향이냐, 우파 성향이냐에 따라 답이 쫙 갈린다. 노조 문제, 전교조 문제, 새만금 문제 등 무슨 이슈가 제기된다 해도 우리는 그 사람의 성향만 알면 그 사람이 말하기도 전에 그 사람의 답을 알 수 있다.

"너는 좌파니까, 너는 보수니까 네 답은 뻔해"라고 말할 수 있는 정도가 됐다. 이런 풍토에서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무엇이 정말 우리의 실생활에 필요한 것이고 유익한가에는 관심이 없다. 나의 이념만이 모든 것의 잣대가 되는 것이다.

이념에 의한 판단은 단순하다. 가진 자는 악이고 없는 자가 선이라고 믿고, 자연훼손은 무조건 나쁜 것이고 보존만이 선이라고 믿는다. 이 공식에 대입하면 모든 일에 척척 해답이 나온다.

그러나 세상 일이, 현실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현실을 단 하나의 잣대로 판단한다면 그 판단이 옳을 수 있을까. 애석하게도 보통사람은 이런 단순분석에 빠져들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때는 파시즘과 문화혁명 같은 광풍이 몰아치기도 하는 것이다.

*** 외교 전문가 의견 귀 기울여야

파병 문제는 여러 복잡한 요인을 고려해야 할 외교문제다. 그것을 "전쟁은 악" "당신의 아들이라면 보내겠느냐"는 단순논리로 판단할 일이 아니다. 외교는 상대가 있고, 그 상대를 잘 아는 문제만도 전문적 지식과 경험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파병여부의 결정을 대중운동에 맡기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보다는 이 나라 엘리트들의 판단을 기다려보자. 단 지금의 지도자들이 이념적 잣대나 머릿수에 따라서가 아니라 실용적 잣대에 의해 전문가적 판단을 내려 주기를 바란다. 국민참여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외칠 때와 잠잠할 때를 구별할 줄 아는 지혜로움이 필요한 시기다.

문창극 논설위원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