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상언의 시선

임종헌도 국민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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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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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대한민국 국민이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고시에 합격했고, 지난해 3월까지 판사로 일했다. 그는 현재 ‘사법 농단’을 기획·집행한 ‘공공의 적’으로 지목돼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는 지난달 27일에 구속돼 일반 국민이 누리는 자유와 권리의 일부를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는 보장받는다. 헌법과 법률에 그렇게 쓰여 있다. 설사 그가 국민이 아니라고 해도 이 권리가 제한되지는 않는다. 외국인이 한국에서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도 재판 절차와 방법은 달라지지 않는다.

공정하게 재판 받을 권리 무시하는 특별재판 #명분 앞세워 헌법 정신 훼손한 과거 답습하나

임 전 차장을 비롯한 이른바 ‘사법 농단 세력’을 재판할 특별재판부 설치에 더불어민주당과 야 3당(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정의당)이 합의했다. 국회에는 이 재판부를 만드는 법안이 제출돼 있다. 박주민 등 더불어민주당 의원 57명이 발의했다.

이 법안 10조 ①항에는 ‘대상 사건의 제1심 재판은 국민참여재판으로 한다’고 쓰여 있다. 국민참여재판을 강제하는 조항이다. 그런데 국민참여재판 방법을 규정하는 ‘국민의 형사재판 참여에 관한 법률’에는 ‘피고인이 국민참여재판을 원하지 않을 경우 하지 아니한다’고 적혀 있다. 강제할 수 없다는 뜻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국민참여재판은 원하는 피고인만 받았다. 박 의원은 이를 모르지 않았다. 10조 ②항에 ‘대상 사건에 관하여는 ‘국민의 형사재판 참여에 관한 법률’ 제5조, 제6조, 제8조, 제9조, 제11조 및 제36조 제2항을 적용하지 아니한다’를 넣었다. 피고인의 선택과 관련된 법규를 이 사건에는 적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법안이 국회에서 의결되면 임 전 차장은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국민참여재판을 받아야 한다. 일반 피고인에게 보장되는 선택권을 그는 가질 수 없게 된다.

시선 11/01

시선 11/01

이 법안은 특별재판부에 판사 세 명을 두도록 하는데, 판사 선정 방법이 독특하다. 특별재판부 후보추천위원회를 만들어 대법원장에게 현직 법관들을 추천하게 돼 있다. 추천위원은 대한변협과 법원 판사회의가 세 명씩 지명하고, 대법원장이 ‘학식과 덕망이 있고 각계 전문 분야에서 경험이 풍부한 사람으로서 변호사 자격을 가지지 않은 사람 세 명’을 골라 총 9명으로 꾸리도록 한다. 변호사 단체, 학식·덕망을 갖춘 비법조인이 판사 선정에 관여하게 되는 것이다. 헌법 101조에는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속한다’고 쓰여 있다. 법원과 관련된 헌법 조항의 첫머리에 해당한다. 헌법을 만든 국회가 삼권분립, 사법부 독립을 그만큼 중시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조항에 대해 책 『지금 다시, 헌법』은 ‘재판의 당사자들이 사전에 자신들의 사건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나 권력자의 구미에 맞는 사람들이 담당하지 않으리라는 신뢰를 가질 수 있도록 한다’고 설명한다. 법원 밖 인사가 재판을 담당할 판사를 정하는 데 개입하는 것은 ‘사법권이 법원에 속한다’는 헌법 정신에 위배된다는 게 지금까지 믿어 온 상식이다.

사건이 접수되면 법원은 담당 재판부를 선정한다. ‘배당’이라는 절차다. 무작위 선정이 원칙이다. 법원은 ‘컴퓨터 추첨’ 방법을 써 왔다. 법원장이 간섭할 수 없는 과정이다. 대법원장도 손댈 수 없는 부분이다. 9년 전 신영철 전 대법관이 서울중앙지법원장 시절에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 관련 사건을 특정 재판부로 보냈다는 이유로 탄핵 직전의 상황을 맞았다. 현재의 집권층 구성원 중 상당수가 그때 평등하게 재판받을 헌법적 권리를 외쳤다.

특별재판부가 만들어지면 배당은 생략된다. 추천된 후보 중에서 김명수 대법원장이 고른 판사 세 명이 자동으로 관련 재판을 맡게 된다. 평소 피고인에 관대한 판사를 고르든, 엄한 판사를 고르든 김 대법원장 마음대로다. 임 전 차장이 잘나가던 때 그로 인해 인사상 불이익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판사든, ‘사법부 적폐’ 청산을 주장하는 판사든 지명은 김 대법원장 뜻에 달린 일이 된다. 무작위가 아니라 누군가의 의도에 따라 담당 판사가 정해지면 재판 공정성이 의문의 대상이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변호사 시절에 법정에서 헌법 제1조를 외치는 장면(영화 ‘변호인’)을 보고 가슴이 뜨거워졌던 시민과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헌법재판소의 준엄한 결정에 힘입어 이 나라를 이끌게 된 사람들은 헌법 정신을 존중할 것으로 믿었다. 헌법을 어기는 일을 하면서 “정의를 위하여” 또는 “진정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위하여”라고 강변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조국 근대화’와 ‘정의사회 구현’ 등의 대의(大義)를 내세우며 헌법을 무시한 이들과는 180도 다를 줄 알았다. 헌법을 들춰봐야 하는 상황을 여전히 자주 맞이하는 것, 이 또한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이상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