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미·영 정상의 이라크전 실책 인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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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국제사회의 여론과 합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이라크 전쟁을 밀어붙인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이라크전과 관련한 실책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지난 주말 백악관에서 있었던 공동 기자회견에서 부시 대통령은 "모든 게 우리가 바라는 방식으로 전개되진 않았다"면서 '오사마 빈 라덴을 죽이든 살리든 체포하라' 같은 과격한 표현과 아부그라이브 교도소 수감자 학대 사건을 가장 큰 잘못으로 꼽았다. 블레어 총리도 "사담 후세인 정권의 붕괴가 민주적 이라크의 시작이 아님을 알았어야 했다"며 "좀 더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어야 했다"고 실수를 시인했다.

회견에서 부시 대통령이 "올바른 일을 했고, 지금도 그렇다고 믿는다"고 밝힌 데서 알 수 있듯이 두 정상이 이라크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2003년 3월 개전 이후 전쟁의 정당성만을 줄기차게 강조해온 두 정상이 공개적으로 실책을 인정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라크전에 대한 국내외의 부정적 여론을 더 이상 감당키 어렵다는 점을 마침내 인식한 결과로 보이기 때문이다.

후세인 정권 몰락 이후 첫 민선 정부가 지난주 출범했지만 이라크는 유혈 종파 분쟁으로 하루에도 수십 명씩 목숨을 잃는 극도의 혼란에 휩싸여 있다. '대량살상무기 색출'이란 명분은 허구로 드러났고, 이를 대신한 '민주주의 확산'도 그동안 치른 대가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명분이다. 당연한 결과로 두 정상의 지지도는 집권 이후 가장 낮은 30% 수준까지 떨어졌다.

두 정상은 이라크전의 실수를 교훈 삼아 국제사회의 최대 현안인 이란 핵 문제에서 합리적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 국제법적 절차와 관행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유혹에 빠져서도 안 되겠지만 뒤로 물러난 채 손을 놓고 있어서도 안 된다. 국제사회와 긴밀히 공조하되 필요하다면 이란과의 직접 대화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 실수를 인정하는 것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