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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에서 나온 장발장에게 위스키를 마시게한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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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김대영의 위스키 읽어주는 남자(6)

소설을 읽다 보면 위스키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대부분 주인공이 외롭거나 크게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때다. 얼마 전 읽은 소설 『침묵주의보』에서는 기자 생활에 회의를 느낀 등장인물이 해외로 이민 가기 전에 주인공과 위스키를 마신다. 작가가 선택한 위스키는 조니워커 블랙라벨. 조니워커 중에도 스모키한 향이 두드러지는 위스키를 고른 것은 안개처럼 뿌연 등장인물의 심리상태를 녹이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조니워커 블랙 라벨과 조니워커의 상징 스트라이딩맨. [사진 김대영]

조니워커 블랙 라벨과 조니워커의 상징 스트라이딩맨. [사진 김대영]

올해 초에 읽은 소설 『레미제라블』에도 위스키가 등장한다. 흥미진진한 전개에 술술 책을 읽다가 '위스키'란 글자가 눈에 밟혔다. 바로 장발장이 구덩이 속 관에 숨어있다가 탈출하는 장면. 장발장을 돕던 노인은 죽은 줄 알았던 그가 살아있는 걸 확인하고 곧장 위스키를 건넨다.

“그는 호주머니를 뒤져 미리 준비해 두었던 병을 꺼냈다. “우선 한 모금 하십시오!” 하고 그는 말했다. 바깥바람과 더불어 그 병이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었다. 장발장은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세계문학전집 레미제라블2 / 민음사 / 436P)

“신은 물을 만들었지만, 인간은 와인을 만들었다”며 와인을 극찬했던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가 왜 장발장에게 와인이 아닌 위스키를 건넸을까?

뮤지컬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 역을 맡은 뮤지컬배우 정성화(왼쪽). 구덩이 속에 숨어있던 장발장에게 왜 와인이 아닌 위스키를 건넸을까? [중앙포토]

뮤지컬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 역을 맡은 뮤지컬배우 정성화(왼쪽). 구덩이 속에 숨어있던 장발장에게 왜 와인이 아닌 위스키를 건넸을까? [중앙포토]

우선, 장발장이 처한 상황을 생각해보자. 구덩이 속 관에 몇 시간 동안 방치되어있던 그는 체온이 상당히 떨어졌다. 체온을 올리는 데는 와인보다 위스키나 보드카처럼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이 나은 법. 노인은 장발장이 구덩이에서 나오면 몸을 덥혀줘야겠단 생각에 미리 위스키를 준비한 것 같다.

한 잔의 위스키는 추운 날 몸을 덥히는 데 최고다. [사진 김대영]

한 잔의 위스키는 추운 날 몸을 덥히는 데 최고다. [사진 김대영]

위스키의 어원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위스키’는 라틴어 ‘aqua vitae(생명의 물)’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aqua vitae는 원래 와인을 증류한 술이었다. 1300년대에 이탈리아를 오가던 무역업자, 외교관, 수도사 등에 의해 유럽 각지로 퍼졌다. 이후 aqua vitae는 와인뿐만 아니라, 각지에서 생산되는 재료(각종 과일, 보리, 밀가루, 감자 등)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보리를 사용해 aqua vitae를 만들었고, 게일어 ‘uisce beatha(생명의 물)’로 번역됐다. 이후 ‘uisce’가 ‘whisky’ 또는 ‘whiskey’로 변했다.

따라서 빅토르 위고가 장발장에게 위스키를 건넨 것은 ‘생명의 물’을 마시고 살아난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바깥바람과 더불어 그 병이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었다’라는 문장에서 위고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생명의 물, 위스키. [사진 김대영]

생명의 물, 위스키. [사진 김대영]

마지막으로 블렌디드 위스키 대중화가 소설 속 위스키 등장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1830년대 연속식 증류기가 발명되면서 위스키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연속식 증류기는 다양한 곡물을 원료로 그레인 위스키를 대량으로 만들었지만, 단일식 증류기가 맥아만을 원료로 만들어내는 몰트위스키에 비해 풍미가 떨어졌다.

그래서 당시 위스키를 팔던 상인들은 몰트 위스키와 그레인 위스키를 섞어(블렌딩), 위스키 고유의 풍미를 지키면서도 대량 판매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조니워커와 발렌타인으로 대표되는 블렌디드 위스키의 탄생이다.

블렌디드 위스키 로얄 살루트 32년. 장발장이 마신 위스키 브랜드가 궁금하다. [사진 김대영]

블렌디드 위스키 로얄 살루트 32년. 장발장이 마신 위스키 브랜드가 궁금하다. [사진 김대영]

1860년대에는 서로 다른 위스키를 블렌딩하는 것이 합법화되면서, 본격적인 블렌디드 위스키 전성시대가 열렸다. 빅토르 위고는 나폴레옹을 비판하다 반정부 인사로 낙인 찍히자, 1859년 프랑스 서부 해안의 영국령 건지섬(Guernsey Island)으로 망명했다.

그는 건지섬 생활 3년만인 1862년에 『레미제라블』을 출판한다. 블렌디드 위스키의 대중화 바람이 영국령 건지섬에서 창작열을 불태우던 한 프랑스 작가의 코끝을 스쳐 간 건 아닐까.

김대영 중앙일보 일본매체팀 대리 kim.daeyou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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