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호法’ 만든 친구들…“변화 갈구한 창호 친구였기에 가능했던 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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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호씨 대학동기인 김민진씨가 지난 12일 해운대백병원 중환자실을 찾아 병문안하고 있다. 이은지 기자

윤창호씨 대학동기인 김민진씨가 지난 12일 해운대백병원 중환자실을 찾아 병문안하고 있다. 이은지 기자

“창호야, 나 국회와 청와대를 다녀왔어.”

음주운전 사고로 뇌사빠진 윤창호씨 친구 10명 #사고 발생 이후 열흘간 밤 새워가며 법안 만들어 #하태경 국회의원 “11월 의원 100명과 공동 발의” #아버지 “법안 보고픈지 생명 놓지 않는 것 같아” #

지난 12일 오후 대학생 김민진(22)씨는 부산 해운대백병원 중환자실에서 윤창호(22)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얘기했다. 음주운전 치사를 살인죄로 처벌하는 내용의 ‘윤창호법’(가칭)을 국회와 청와대에 전달하고 온 직후였다.

창호씨는 지난달 25일 오전 2시 해운대구 미포오거리에서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뇌사상태에 빠졌다. 의학적으로는 살아 날 가능성이 없는 상태다. 민진씨는 창호가 알아들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국회와 청와대를 다녀온 얘기를 주섬주섬 얘기했다. 이날 바른미래당 하태경 의원은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오는 11월에 열리는 상임위원회 법안소위에서 의원 100명과 윤창호 법을 공동발의하겠다”고 밝혔다.

고려대 행정학과 3학년인 김씨는 창호씨의 대학 동기다. 창호씨가 지난달 25일 오전 2시 사고를 당하자 친구들은 한달음에 병원에 달려왔다. 친구들은 가해자가 사과조차 하러 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격분했고, 가해자 처벌 규정도 미약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사고 발생 4일째 되던 지난달 9월 28일 민진씨와 창호씨의 중·고등학교 친구 9명 등 10명은 일명 윤창호법을 만들기 시작했다. 열흘 동안 매일 병원 식당과 복도를 전전하며 새벽 2~3시까지 조사를 하고 법안 문구를 만들었다. 일면식이 없던 친구끼리 절친이 됐다. 음주운전 초범 기준과 음주수치 기준을 강화하고, 음주운전으로 사람이 사망하면 살인죄처럼 처벌한다는 조항을 담은 윤창호법은 이렇게 탄생했다.

윤창호씨 고등학교 친구들이 면회를 앞두고 중환자실 앞에 서 있다. 왼쪽부터 박주연, 예지희, 신태경, 손희원, 이소연씨. 이은지 기자

윤창호씨 고등학교 친구들이 면회를 앞두고 중환자실 앞에 서 있다. 왼쪽부터 박주연, 예지희, 신태경, 손희원, 이소연씨. 이은지 기자

창호씨의 고교 친구인 박주연(22)씨는 “우리가 뛰어나서 윤창호 법안을 만든 게 아니다”며 “창호 친구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고교 친구인 예지희(22) 씨는 “창호는 중학교 때부터 사회 변화를 외쳤다”며 “만약 다른 친구가 똑같이 사고를 당했다면 창호가 제일 먼저 이렇게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법안을 만들면서 창호씨 친구들은 스스로 위안을 받았다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손희원(22)씨는 “창호를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위로가 된다”며 “음주운전 사고로 고통받는 다른 사람들도 위로를 받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친구들 기억 속에 창호 씨는 공부할 땐 공부하고, 놀 땐 노는 친구로 남아있다. 대학 시절을 함께 보낸 김 “시험을 앞두고 창호는 사흘씩 밤을 새워 공부하곤 했다”며 “시험이 끝나면 또 사흘씩 밤새워 노는 열정적인 친구였다”고 말했다. 시험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김씨에게 창호씨는 자신이 정리한 요점정리 노트를 선뜻 내밀기도 했다.

창호씨 아버지인 윤기현씨가 지난 12일 해운대백병원에서 인터뷰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은지 기자

창호씨 아버지인 윤기현씨가 지난 12일 해운대백병원에서 인터뷰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은지 기자

가족들 사이에서 창호씨는 든든한 맏아들이었다고 한다. 아버지 윤기현(54)씨는 “4살 어린 여동생이 새벽까지 독서실에서 공부하면 가서 데려오곤 했다”며 “여동생이 고 3이 되자 수시 전형과 대학교 진학을 모두 알아보고 지도했다”고 말했다. 아들의 뜻에 따라 딸의 대학 원서는 모두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썼다.

창호씨는 중학교 때부터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정했다고 한다. 카카오톡 소개 사진에 청와대 사진을 걸어둔 것도 이때부터다. 고등학교 때에는 검사가 된 뒤 국회에 입성해서 대통령이 되겠다고 구체적인 진로를 정했다. 이때부터 카카오톡 소개 사진은 검찰 로고로 바뀌었다. 창호씨는 다이어리를 바꿀 때마다 첫 장에 ‘짧은 인생을 영원한 조국에’라는 글귀를 썼다고 한다.

아버지 윤씨는 “아들이 자신의 운명을 알고 이렇게 쓴 것 같아 이 글귀를 볼 때마다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프다”며 “윤창호 법이 통과돼 조국의 발전을 외쳤던 아들의 소망이 조금이라도 이뤄지길 바란다”며 울먹였다.

윤창호씨가 평소 쓰던 다이어리에 적혀있는 문구들. 이은지 기자

윤창호씨가 평소 쓰던 다이어리에 적혀있는 문구들. 이은지 기자

가족들은 창호씨의 장기기증을 고려하고 있다. 윤씨는“법안이 발의되고 어떻게 진행돼 가는지 창호가 조금 더 보고 싶은 마음에 생명의 끈을 아직도 놓지 않는 것 같다”며 “때가 되면 가족과 상의해서 결단을 내려야 할 것 같다”고 힘겹게 말했다.

부산=이은지 기자 lee.eunji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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