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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경호 논설위원이 간다

통계청 가사노동 가치 발표날, 주창자는 노벨상을 받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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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올해 노벨경제학상 톺아보기

 올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윌리엄 노드하우스 예일대 교수(왼쪽)와 폴 로머 뉴욕대 교수. [일러스트=Niklas Elmehed, 노벨 미디어 AB 2018 ]

올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윌리엄 노드하우스 예일대 교수(왼쪽)와 폴 로머 뉴욕대 교수. [일러스트=Niklas Elmehed, 노벨 미디어 AB 2018 ]

매년 발표되는 노벨경제학상이 도대체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 하는 분들이 많다. 한데 수상자의 이론을 톺아보면 우리와의 관련이 적지 않다. 올해 수상자인 윌리엄 노드하우스 예일대 교수와 폴 로머 뉴욕대 교수 기사가 게재된 9일 신문만 봐도 그렇다. 통계청이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를 국가 공식통계로는 처음으로 평가했다는 기사가 모든 신문에 실렸다. 2014년 기준 무급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는 360조7300억원이며 명목 국내총생산(GDP)의 24.3%를 차지한다는 내용이다. 통계청 기사는 노드하우스의 주장과 맥이 닿아있고, 소득주도 성장은 로머의 ‘아이디어 주도 성장’과 대비되는 측면이 있다.

노드하우스가 환경에 관심 둔 이유 #1972년 논문에서 GNP 통계 비판 #로머는 ‘아이디어 주도 성장’ 관심 #현명한 시장 개입으로 R&D 촉진 #소득주도 성장이 혁신에 도움 될까 #“경제학자, 가슴과 이성 결합해야”

“기후 변화와 기술 혁신을 장기 거시분석과 통합해 글로벌 경제의 지속가능한 성장에 해법을 제시했다.”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위원회는 8일(현지시간) 윌리엄 노드하우스(77) 예일대 교수와 폴 로머(63) 뉴욕대 교수를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발표하면서 수상자의 업적을 이렇게 요약했다. 노벨위원회는 두 학자가 신고전파 경제학의 대표적인 경제성장론인 로버트 솔로(1987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의 모델을 기반으로 경제분석의 지평을 자연(기후 변화)과 기술 혁신이 경제에 미치는 장기적인 영향까지 확대했다고 평가했다.

솔로 모델은 기계 설비나 인프라 같은 물적 자본이 축적됨에 따라 장기적으로 성장률이 떨어진다고 설명한다. 한계생산 체감의 법칙 때문에 추가적인 자본 투자에 따른 수익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다. 선진국의 낮은 성장률과 중국 등 신흥국의 고성장을 잘 설명해주는 모델이었다. 솔로 모델에 따르면 후진국은 빠르게 성장하면서 선진국을 따라잡을 것 같은데 실제는 나라마다 성장률 편차가 컸다. 솔로 모델도 이런 차이의 원인을 기술 혁신에서 찾았지만 왜 그런 차이가 생기는지는 따지지 않았다. 뭔지 잘 모르지만 마치 블랙박스에서 나오는 외생(exogenous) 변수로 취급했다. 기술 수준은 그저 주어진 것으로 가정했다는 의미다.

로머는 1990년 솔로 모델의 그 블랙박스를 열어젖혔다. 새로운 지식과 기술 혁신은 연구·개발(R&D)의 산물이다. 그런데 R&D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수준보다 적게 이뤄질 개연성이 크다. 지식과 아이디어는 일반적인 상품과 달리, 내가 쓴다고 다른 사람이 못 쓰는 게 아니어서다. 경제학에서는 이런 상품을 비경합적(non-rival) 재화라고 부른다. 로머는 지식과 기술의 이런 특징이 경제성장을 결정한다고 봤다. R&D가 충분하지 않은 시장 실패는 잘 설계된 정부의 시장 개입으로 보완할 수 있다. R&D에 보조금을 주거나 신기술에 특허권을 부여해 일정 기간 독점권을 보장하면 R&D를 늘리는 인센티브가 되기 때문이다. 로머의 이론을 내생적(endogenous) 경제성장론으로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다. 아이디어와 기술 혁신도 단순히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정책 당국의 의식적인 노력으로 시장에서 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벨경제학상

노벨경제학상

노드하우스는 기후 변화 같은 환경요인이 장기적 경제 성장에 미치는 영향을 정량적으로 분석하는 모델을 만들어 환경을 엄밀한 경제분석의 틀 안으로 끌어들인 점을 인정받았다. 로머가 R&D의 과소 생산을 걱정한 것처럼 노드하우스는 지구온난화를 초래하는 화석연료 사용 문제가 경시될 가능성을 우려했다. 경제활동이 다른 경제 주체의 영향을 받는 것을 경제학에선 외부성(externalities)이라고 한다. 그냥 시장에 맡겨두면 긍정적인 외부효과를 주는 R&D는 적게 이루어지고, 부정적인 외부효과를 주는 화석연료 사용은 많아질 위험이 있다. 이른바 시장 실패다. 노드하우스는 온실효과를 개선하기 위해 글로벌 차원에서 모든 국가에 탄소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영국 경제학자 아서 피구가 1920년 제안한 피구세(稅)를 기후 변화 시대에 맞게 구체화한 것이다. 피구세는 환경오염에 따르는 사회적 비용을 경제 주체에 부과하는 세금이다.

노벨위원회는 기후 변화와 관련된 노드하우스의 업적에 주목했다. 하지만 노드하우스가 왜 자연과 환경에 관심을 뒀는지는 따로 설명하지 않았다. 노드하우스는 기후 변화를 연구하기 이전부터 기존 경제학의 성장이론에 회의를 품었다. 그는 1972년 미국 경제학자 제임스 토빈(198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과 함께 ‘성장은 한물간 옛 얘기인가(Is Growth Obsolete?)’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논문을 썼다. 토빈은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마라’는 오래된 증시 격언의 원조이며, 국경을 넘나드는 단기 외환거래에 매기는 토빈세로도 유명하다. 노드하우스와 토빈은 이 논문에서 주류 경제학이 맹목적으로 경제 발전을 추종하며 이에 따른 부작용은 무시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고 썼다. 성장이 국가의 우선순위를 왜곡하고 소득분배를 악화시키며 환경을 파괴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국민총생산(GNP)의 극대화가 아니라 개인의 자유와 행복의 극대화를 목표로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당시 유명인사의 발언도 인용했다. 두 학자는 이 논문에서 GNP를 보완하는 경제후생지표(MEW·Measure of Economic Welfare)를 제시했다. GNP 계산방법과 달리, 경제적 후생과 관련된 주부 가사노동과 여가 등의 항목은 추가하고 공해 제거비용처럼 후생과 무관한 항목은 제외한 지표다. 객관적인 수치를 계산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GNP나 GDP처럼 널리 이용되지는 않았지만 경제학계의 관심은 이어졌다. 최근 들어서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와 아마르티아 센 하버드대 교수가 삶의 질과 성장의 지속가능성을 반영하는 새로운 경제지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통계청이 GDP 통계에서 제외된 가사노동의 가치를 처음으로 계산해 공식 발표한 날, 가사노동을 포함한 지표인 MEW를 주창했던 노드하우스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통계청이 발표날짜 하나는 기막히게 잡았다.

로머의 ‘아이디어 주도 성장’은 과거 보수 정권의 녹색성장·창조경제나 지금 정부의 혁신성장과 맥이 닿아있다. 곽노선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는 “소득이나 임금은 (시장에서 결정되는) 내생변수인데 정책변수처럼 인위적으로 설계하는 게 가능한지도,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한규 동덕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소득주도 성장이 어떻게 혁신의 인센티브를 줄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과거 정부의 성장정책이 실패한 것은 결국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루는 공정 정책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국에서 처음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이는 폴 사무엘슨(1915~2009)이다. 전 세계에서 400만 부 이상 팔렸다는 경제학 교과서를 썼다. 1948년 처음 출간된 책이 2009년까지 19판을 찍었다. 노드하우스는 1985년 나온 12판부터 공저자로 참여했다. 12판의 저자 후기에 이런 말이 나온다. “마틴 루서 킹처럼 우리에게도 꿈이 있다. 시장의 뛰어난 효율성도 인간적인 사회라는 목표를 위해 견제될 수 있다는 꿈이다. 이성은 결코 알 수 없는 이유가 가슴엔 있다. 그러나 경제학자의 일은 가슴에서 솟는 목표와 증거에 기반한 이성을 결합하는 것이다.”

서경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