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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관론 펼치다 북한에 뒤통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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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25일로 예정됐던 동해선과 경의선 열차 시험 운행이 북한의 거부로 취소됐다. 24일 선로 시험 운행을 위해 강원도 동해선 제진역으로 옮겨진 열차가 역 구내에 정차해 있다. [연합뉴스]

북한의 일방적 통보에 의한 남북 간 열차 시험운행 계획 취소가 남북 관계에 파장을 던지고 있다. 날짜.시간대까지 합의한 남북 당국 간 합의서가 휴지조각이 됐기 때문이다. 남북 간 교류협력 일정에 미칠 후유증이 간단치 않을 전망이다.

당장 6월 말로 예정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철도 재방북 구상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29일 2차 실무접촉을 남겨두고 있지만 철도 방북을 다시 한번 타진하려던 정부는 타격을 보게 됐다. 북한이 항공편 이용을 제안한 데다 이번 시험운행 무산으로 결정타를 입었다.

6월 초 제주에서 예정된 12차 경제협력추진위원회 회의에서 정부는 북한에 수백억원 규모의 비누.신발.의류 원자재 제공을 해 주려던 참이었다. 철도 건설자재 50억원어치도 곧 제공해야 한다. 철도 시험운행에 대한 사실상의 반대급부였다. 그런데 국민의 비판 여론으로 선뜻 내주기는 녹록지 않게 됐다.

문제는 대북정책 전반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한층 고조될 수 있다는 점이다. 정부는 대북 경제 협력.지원과 사회문화 교류가 북한의 정치.군사부문의 변화를 이끌어 낼 것이라고 자신해 왔다. 철도 시험운행을 북한 군부가 마침내 변화의 몸짓을 시작한 것이라고도 봐 왔다. 정부가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셈이다.

북한의 합의 위반에 대한 미지근한 정부 태도도 문제다. 북한은 행사 취소를 통보하면서 엉뚱하게 "남측 친미.극우보수세력이 공화국기(인공기)를 악질적으로 불태웠다"는 등 남한 내부의 정세를 왜곡하는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통일부는 "매우 유감스럽다. 책임은 북측에 있다"는 요지의 성명에 그쳤다. 당국자들은 "북한 내부 사정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공개 언급을 피하는 분위기다. 북한이 합의 이행에 나서도록 강제할 의지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마땅한 대응책도 없다.

정부가 상황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23일 낮까지 개성역 등에서 북한 측이 행사 준비를 하는 게 목격된 만큼 북한 군부가 급작스레 상황을 바꾼 측면이 있다. 그렇지만 같은 날 오후 북한 군부가 "쌍방 합의가 없는 방식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전통문을 보내왔는데도 통일부는 이를 공개하지 않았다. 행사가 무산될 수 있는 이상 징후가 있었는데도 군사보장 합의 없이 명단 통보만으로 행사가 가능할 것이란 낙관론만 펼치다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이종석 통일부 장관은 22일 KBS1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어떤 형태로든 (시험운행을 위한 군사적 보장조치가) 될 것"이라고 말했었다. 군사보장 합의가 반드시 필요하다던 정부는 상황이 여의치 않자 입장을 바꿨다. 당국자는 "최고지도부의 지시나 군부의 동의 없이 열차 시험운행 시간까지 남측에 제시할 수 있느냐는 판단에 따라 이행을 의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여기에 31일 지방선거를 의식해 철도 시험운행에 무리수를 둔 게 아니냐는 곱지 않은 시선까지 쏟아진다. 대북정책을 국내 정치에 이용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은 정부의 아킬레스 건이다. 열차는 멈췄지만 정부의 고민은 계속 깊어가고 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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