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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취운전 체험기] '음주고글' 착용 후 도로서 차 몰아보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8일 오전 경기 일산서부경찰서 뒤편 도로에서 만취, 야간운전 체험을 하고 있다. 특수고글을 쓰고 운전했는데 정지선을 한참 벗어났다. [사진 일산서부경찰서]

8일 오전 경기 일산서부경찰서 뒤편 도로에서 만취, 야간운전 체험을 하고 있다. 특수고글을 쓰고 운전했는데 정지선을 한참 벗어났다. [사진 일산서부경찰서]

만취 후 야간 운전 체험 가능한 특수고글 쓰고 운전했더니

“드드득~” “끼익” “정지! 정지!” 노란 중앙선을 넘어가기 일쑤였다. 횡단보도 정지선 지키기는 수차례 시도에도 실패했다. 또 고깔 모양의 높이 70㎝짜리 장애물(라바 콘)의 원근감은 헛갈렸다. 피했다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차로 밀고 다니고 있었다. 지난 8일오전 경기 일산서부경찰서의 도움으로 진행한 음주 후 운전체험에서다.

이날 기자는 면허취소 수치인 혈중알코올농도 0.17~0.2%의 ‘만취’ 상태에 ‘야간’운전까지 체험이 가능한 특수고글을 착용했다. 시야가 흐리고 사물이 왜곡돼 보였다. 평평해야 할 도로가 올라와 제대로 걷기조차 어려웠다. 이 상태로 차에 올랐다. 이후 30여분간 일산서부서 뒤편의 왕복 4차선, 길이 180m(편도 기준) 규모의 실제 도로를 달렸다. 안전을 위해 도로 양방향은 잠시 통제했다. 전날 술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지만, 5년을 길들인 차량은 도로 위서 연신 비틀거렸다.

술을 마시지 않고도 만취상태를 경험할 수 있는 특수고글. 보기에 따라 시야가 제한적으로 되거나 일부 사물이 왜곡돼 보인다. 김민욱 기자

술을 마시지 않고도 만취상태를 경험할 수 있는 특수고글. 보기에 따라 시야가 제한적으로 되거나 일부 사물이 왜곡돼 보인다. 김민욱 기자

몽롱한 상태서 중앙선 넘고 횡단보도 정지선도 지나쳐 ‘아찔’

첫 체험코스는 횡단보도 정지선 지키기였다. 일산서부서 교통관리계 박가영 경사의 수신호에 맞춰 100m 거리를 시속 30~40㎞ 속도로 달리다 정지선 앞에서 차를 세우는 거였다. 페이탈 비전(fatal vision·치명적인 시야)이라고 적힌 특수고글답게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아차’ 순식간에 중앙선을 넘었다. 분명히 똑바로 직진 중이었다. ‘드득’ ‘드드득’ 중앙선 위에 세워둔 라바 콘을 치거나 밑부분을 밟고 지나갔다.

핸들을 꺾자 전방의 횡단보도를 예고하는 폭 150㎝ 마름모 기호가 나타났다. 평상시보다 두꺼웠다. 곧 눈앞에 정지선이 보여 브레이크를 밟았다. 내려서 확인해보니 정지선을 이미 220㎝나 넘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시야가 좁아지면서 정지선 인근에 서 있던 박 경사를 보지 못했다. 어리둥절했다. 박 경사는 “복잡한 도심이었다면 사람을 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응속도 지연에 사고 위험성 커져

두 차례 더 시도해봤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중앙선·정지선을 모두 어겼다. 도로교통공단에 따르면 음주=반응속도 지연이다. 돌발상황에 기민하게 대체하기가 어렵다는 거다. 혈중알코올농도가 0.05%와 0.1%일 때 각각 0.4초, 1초 지연된다. 이에 따른 정지거리는 길어진다. 그만큼 사고 위험성이 증가한다는 의미다. 실제 무 음주 상태의 정지거리보다 0.05%는 6.6m, 0.1%는 16.6m 늘어난다(시속 60㎞ 기준).

[자료 도로교통공단]

[자료 도로교통공단]

음주 후엔 충동제어 힘들어 장애물 회피 능력 떨어져

나머지 코스는 지그재그 운전으로 장애물을 피하는 체험이다. 10개의 라바 콘을 3~5m 간격으로 중앙선 위에 일렬로 죽 세워놓았다. 역시 페이탈 비전 고글을 착용한 상태로 출발했다. 첫 번째 라바 콘을 피하기도 잠시, 두 번째 라바 콘이 차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세·네 번째 라바 콘 역시 쳤다. 위험(장애물) 발견이 늦어지면서다. ‘크으으으윽’ 차로 라바 콘을 질질 끄는 것인지, 미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핸들을 이리저리 돌렸다. 어느 순간 라바 콘이 어딨는지 분간하기 어려울 때 또 다른 라바 콘 앞에 멈춰섰다. 정재승 일산서부서 교통관리계장은 “음주 후 뇌의 감정을 담당하는 구피질 기능이 활발해지면 충동제어가 힘들어진다”며 “위험한 사고를 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왕복 4차로 중앙에 세워놓은 라바 콘을 피하지 못하고 부딪혔다. [사진 일산서부경찰서]

왕복 4차로 중앙에 세워놓은 라바 콘을 피하지 못하고 부딪혔다. [사진 일산서부경찰서]

“음주운전이 실수?” 음주 차는 도로 위 '흉기'

박 경사는 “음주 운전자가 몬 차는 도로 위 흉기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살인예비 행위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여전하다. 지난달 25일 부산 해운대에서는 법조인을 꿈꾸던 20대 청년이 음주 차량에 치여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다. 뇌사 위기다. 지난해만 음주운전으로 인한 사고로 439명이 목숨을 잃고, 3만3364명이 다쳤다.

지난달 25일 부산 해운대구 중동 미포오거리에서 술에 취한 운전자가 BMW승용차로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길에 서 있던 보행자 2명을 치고 주유소 담벼락을 들이받은 끔찍한 사고가 발생했다. [사진 부산경찰청 제공=뉴스1]

지난달 25일 부산 해운대구 중동 미포오거리에서 술에 취한 운전자가 BMW승용차로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길에 서 있던 보행자 2명을 치고 주유소 담벼락을 들이받은 끔찍한 사고가 발생했다. [사진 부산경찰청 제공=뉴스1]

정재승 일산서부경찰서 교통관리계장(사진 왼쪽)과 박가영 경사가 음주운전의 심각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민욱 기자

정재승 일산서부경찰서 교통관리계장(사진 왼쪽)과 박가영 경사가 음주운전의 심각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민욱 기자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장택영 수석연구원은 “음주운전은 무고한 시민에게 엄청난 재앙을 안기는 반사회적 행위다”며 “음주운전을 실수로 보는 지극히 관대한 사고를 우리 사회에서 뿌리 뽑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음주운전 단속기준을 혈중알코올농도 0.05%에서 0.03%로 강화하는 한편, 운전자가 술을 마셨을 때 차를 운행하지 못하게 하는 시동잠금장치를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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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김민욱 기자 kim.min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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