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본보기' 김법린 원장의 충고
나는 대학 2학년 때 부친을 여의었다. 이 때문에 20대 초반에는 가장 고마운 스승으로 모셨던 김법린 초대 원자력원장과 신태환 법대 학장 겸 행정대학원장이 자연스럽게 삶의 본보기로 자리 잡았다. 특히 김 원장은 내가 미국 유학 직전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 데 ‘결정적인’ 조언을 했다. 조언은 길지 않았지만 단호했다. 거기에 담긴 사연과 의미는 참으로 깊었으며 그 여운은 평생 내 가슴에 남았다.
정근모, 과학기술이 밥이다 - 제131화(7557) #<9>가난한 나라 과학자의 소명 #-김법린 원자력원장, 중국인 첫 노벨상 수상자 의미 질문 #-57년 노벨물리학상 수상한 중국인 리정다오·양전닝 #-시카고대에 유학하고 연구 여건·대우 좋은 미국 남아 #-리는 컬럼비아대, 양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근무 #-과학기술 유학 떠나 박사 학위 받아도 귀국 않고 #-가난한 조국 중국엔 아무런 도움 주지 못한 점 지적
어느 날 김 원장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원자력원 수습행정원으로 일하다 보니 어느덧 미국 유학을 떠나야 할 시간이 눈앞으로 다가온 시점이었다. 다시 물리학 전공으로 돌아가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니 마음이 들떴다. 당시 가난했던 한국에서 유학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나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물리학을 공부하러 가게 됐으니 자부심도 컸다. 머릿속은 뭔가 이뤄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미국에서 연구한 중국인 노벨상의 의미
그런 나를 앞에 앉힌 김 원장은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군! 곧 미국으로 유학을 가야 하겠군. 그런데 내가 깊이 부탁할 일이 있네.”
이렇게 말문을 뗀 김 원장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당부를 했다. 그는 중국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를 언급하며 내게 질문을 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얼마 전에 중국인 과학자 두 명이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지 않았는가. 그 과학자들은 미국 시카고대에서 공부한 뒤 미국에 남아 과학 연구를 계속했다지. 그러면 그 사람들이 받은 노벨상은 중국의 것인가. 미국의 것인가?”
물리학자 2명, 57년 중국의 첫 노벨상
이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번쩍했다. 미국 유학을 떠날 내게 중국인 노벨상 수상자 이야기를 꺼낸 의미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1957년 노벨 물리학상은 중국인 리정다오(李政道·92)와 양전닝(楊振寧·96)이 공동으로 받았다. 중국인이 수상한 첫 노벨상이다. 당시 리는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 양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연구원이었다. 이들은 49년부터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입자물리학을 공동으로 연구해왔는데 그 성과로 각각 31세와 35세의 젊은 나이에 노벨상 수상자가 됐다.
미국에 남은 유학생…문제는 두뇌 유출
두 사람은 시카고대에 유학해 박사학위를 받은 뒤 연구 여건과 대우가 좋은 미국에 남아 미국 과학계에서 일했다.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 간 내전을 거쳐 49년 본토에 들어선 공산국가 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으로 옮겨간 중화민국으로 분단돼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이런 조국으로 돌아갔다면 자신들이 해왔던 연구를 계속하지도, 노벨상을 탈 만큼 학문을 완성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 노벨상에도 과학기술 낙후
하지만 당시 중국은 여전히 과학기술 수준이 뒤처지고 가난한 나라였다. 두 명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를 배출했음에도 사정은 나아질 수 없었다. 산업을 살릴 과학기술자는 유학을 떠난 뒤 거의 돌아오지 않았다. 중국은 부흥을 위해 과학기술 두뇌에 목마른 상황이었다. 이는 한창 6·25전쟁 전후 복구 과정에 있던 당시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김 원장은 이런 사정을 염두에 두고 이들의 노벨상 수상이 중국의 경제발전과 민생에 어떤 도움이 됐는지를 내게 따져 물었던 것이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황수연 기자 ciimccp@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