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산은 내 안에 있다"...'추상화의 거장' 유영국 개인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8면

유영국은 산을 그리되 순수한 조형요소를 빌려 그 본질을 담아내는 데 몰두했다. 1968년 작 ‘Work(Circle A)’. [사진 국제갤러리]

유영국은 산을 그리되 순수한 조형요소를 빌려 그 본질을 담아내는 데 몰두했다. 1968년 작 ‘Work(Circle A)’. [사진 국제갤러리]

몇 개의 붉은색 면, 검은색 삼각형, 그리고 빛처럼 가늘게 스친 두 개의 원과 직선 하나. 극도로 단순한 몇 개의 도형이 있을 뿐인데 화폭은 강렬하고, 풍부하고, 깊은 힘을 뿜어낸다. 평생 자연을 탐구하며 붓을 들었던 화가 유영국(1916~2002)이 52세에 그린 작품 ‘Work(Circle A)’다. 이게 바로 절제가 지닌 힘일까. 반세기 전에 그려진 것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그의 작품들은 현대적인 감각이 돋보인다. 하지만 이런 작품 뒤엔 ‘시대를 앞서간 작가’의 애틋한 뒷얘기가 있다.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 개인전 #1930년대 후반 추상화로 데뷔 #고향 울진의 산과 바다, 빛 담아 #선과 면, 강렬한 색채로 물들여

“내 생애에는 작품이 팔리지 않을 거야.”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은 생전에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의 작품이 처음으로 판매된 것은 1975년, 그의 다섯 번째 개인전에서다. 당시 그의 나이 만 60세였다. 그보다 30여년 전인 1943년,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고향(경북 울진)에서 고기잡이배를 타며 일할 때 그는 단 한 번도 식구들에게 그림을 보여주지 않았다. “내 추상 그림을 보고 실망할 것이 마음에 걸려서” 그랬단다. 한국의 추상미술의 시작은 그렇게 왔다.

‘유영국의 색채추상’전이 열리는 국제갤러리 전시장. 3관은 원숙기 작품 9점으로 구성돼 있다.

‘유영국의 색채추상’전이 열리는 국제갤러리 전시장. 3관은 원숙기 작품 9점으로 구성돼 있다.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에서 유영국 개인전 ‘유영국의 색채추상’이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김환기(1913~1974)와 더불어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유영국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자리다. 한국의 자연을 점과 선, 면 등의 기본 조형요소로 환원한 추상화의 매력을 흠뻑 느껴볼 기회다. 전시는 작가의 동경 유학 시절(1935~1943)부터 그룹활동에 주력한 시기(1948~1964), 그리고 1964년 첫 개인전 이후의 작품 등 24점으로 구성됐다.

일본 오리엔탈사진학교에서 사진을 배운 그가 40년대 경주에서 분황사 탑 등을 찍은 사진도 함께 볼 수 있다. 대상의 기하학적 구조나 표면의 재질감에 주목한 작가의 시선이 돋보이는 사진들이다.

유영국, 'Work'(1969,136*136cm,뮤지엄 산 소장).[사진 국제갤러리]

유영국, 'Work'(1969,136*136cm,뮤지엄 산 소장).[사진 국제갤러리]

“산에 모든 게 다 있다”

유영국의 작품에는 유난히 ‘산’이라는 제목이 많다.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산이 너무 많은 고장에서 자란 탓”이다. 울진이 고향인 그는  산은 “내가 잘 알고, 또 언제든지 달려갈 수 있는 곳”이라며 “산에는 봉우리의 삼각형, 능선의 곡선, 원근의 면, 다채로운 색 등 모든 게 다 있다”고 했다. 그에게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었다.

특히 그가 산을 주요 모티프로 그리기 시작한 것은 50세 이후, 1960년대 말부터다. 극도로 절제한 선과 면으로 기존 회화가 지닌 재현의 한계를 훌쩍 넘어서는 것, 그것이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치열하게 매달린 일이었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을 쓴 박규리 동국대 불교대학원 겸임교수는 “유영국을 키운 것은 백두대간을 잇는 태백산맥의 기세 장대한 산들이었다”며 “산이야말로 유영국 일생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예술혼의 모태이자 궁극적 지향”이라고 말했다.

유영국 (1916~2002). 일본 동경 유학에서 돌아온 그는 울진에서 고기잡이배를 타기도 했다.

유영국 (1916~2002). 일본 동경 유학에서 돌아온 그는 울진에서 고기잡이배를 타기도 했다.

추상은 그에게 자유였다

‘울진 유부자’ 집 아들로 태어나 일본 도쿄 문화학원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1937년 화단에 데뷔한 유영국은 처음 시작에서부터 추상회화의 길을 택했다. 겉모습을 재현하는 그림보다는 작가로서 더 근원적인 것, 본질적인 것을 찾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43년 귀국해 죽변항 부근에서 가업인 ‘뱃일’을 하고, 47년 서울대 교수로 갈 때까지 그는 그림을 마음에서 놓지 않았다.

유영국, 'Work',(1962, oil on canvas, 130*194cm, 개인소장).[사진 국제갤러리]

유영국, 'Work',(1962, oil on canvas, 130*194cm, 개인소장).[사진 국제갤러리]

그런데 왜 하필 추상이었을까. 이인범 상명대 교수는 추상은 “눈에 보이는 그 어느 것에도 마음을 실을 수 없었던 암울한 일제 강점기에 그가 새로운 세계를 꿈꾸고 구축하는 방식이었다”고 풀이했다. “유영국에게 추상은 억압된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자 해방의 출구”였다는 박규리 교수의 해석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유영국의 작업을 두 시기로 압축했다. 제1기는 1937년 일본 유학기 작품부터 64년 개인전을 열기 전까지로,  사람·도시·노을·언덕 등이 순수한 조형 요소로 축약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시기다. 제2기는 1964년 이후부터 2002년 타계할 때까지로, 사회활동을 떠나 홀로 작업에 몰두하던 때다.

이번 전시작 중 특히 눈여겨볼 것은 작가가 독자적인 스타일을 완성한 1964년 이후의 작품 14점이다. 원색은 더 짙어졌고, 빛은 더 현란해졌다. 그리고 기하학적 구조는 더욱 간명해졌다. 작가가 자연의 근원에 한 발짝 더 다가간 작업의 결과물이다.

색채의 마법사

화폭 안에서 그는 엄정하게 질서를 추구했지만, 매우 흥미로운 것은 “유영국의 기하학 추상은 차갑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점이다. 최열 미술평론가는 “유영국의 추상은 순수 추상인데도 여느 구상화보다 더 표현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 특징”이라고 했다. 유영국을 “우주의 빛깔을 훔쳐온 색채의 마법사”라고 부르는 그는 그 요인을 색채에서 찾는다. 최 평론가는 “한국 20세기 추상미술의 절정에 바로 유영국이 있다”며 “그는 화폭을 통해 산과 바다, 하늘 그 자연을 환상적인 빛깔로 물들이는 마법을 펼쳤다”고 했다.

유영국은 1964년 이후 모든 그룹 활동을 접고 홀로 작업에 몰두하며 그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으나 1977년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 꽤 오랜 시간을 병마와 싸우며 작업을 이어갔다. “금으로 된 산도 싫고, 금으로 된 논도 싫고, 나는 그림을 그릴 것이오”라며 순수 추상에서 자유를 찾던 유영국. 2002년 작가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대지와 나누던 대화는 지금도 화폭의 찬란한 빛으로 남았다. 전시는 21일까지.

관련기사

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