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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마음읽기

한반도에서 산다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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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장강명 소설가

장강명 소설가

불과 1년 전에는 ‘이러다 전쟁 나는 거 아냐?’ 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미국과 북한은 서로에게 ‘로켓맨’, ‘개 짖는 소리’ 같은 폭언을 퍼부었다. 그때 누가 “앞으로 1년 안에 남북정상회담이 세 번 열린다”고 예언했다면 믿을 사람이 몇이나 있었을까. 그런데 그것이 현실이 됐다. 내년 이맘때에는 상황이 또 어떻게 바뀌어 있을지 모르겠다.

원하는 방향으로 가속도가 붙은 걸까 #나의 삶과 연결된 새로운 담론을 원해

요즘 남북관계, 북미 관계에 대한 뉴스를 접하며 맛보는 기분은 일단은 안도와 감격, 반가움이다. 그리고 어리둥절함, 멀미, 어지럼증과 같은 느낌이 뒤따른다. 전쟁 위기보다야 대화와 화해 국면이 좋은 것은 분명하니 박수를 친다. 그런데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지금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산에 올랐다가 내리막길에서 깔깔 웃으며 신나게 달리던 어린 시절이 기억난다. 방향을 틀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속도를 제어하지 못해 길 밖으로 벗어난 적도 있다. 그러다 넘어지거나 나무에 부딪혀 호되게 다치기도 했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 몸에 붙은 가속도는 우리가 가야 하는 길과 같은 방향인가? 앞에 돌부리나 중대한 갈림길은 없나? 지도를, 내비게이션을 원한다. 그래야 조금 전 한 걸음이 제대로 된 것이었는지, 다음은 어디로 발을 뻗어야 하는지 평가하고 논의할 수 있다. ‘큰 걸음’이었다고, ‘대체로 그 방향’이라고 무턱대고 반길 일은 아니다.

대전환기임은 분명한데, 주변 상황을 설명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담론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한반도에서 산다는 것’에 대해 어릴 때부터 들어왔던 몇 가지 담론들은 현재 그 역할을 못 하는 것 같다.

그중에는 한 핏줄이니까 한 나라를 이뤄야 한다는 담론이 있었다. 그러나 한 민족이 여러 국가로 나뉜 사례는 수두룩하다. 정작 한국은 다민족 국가로 진입하는 중이다. 같은 민족이라고 묶기에 남북한의 거리는 다방면에서 너무 벌어졌고, 이산가족 수는 줄고 있다. 이산가족은 통일이 아니라 자유로운 교류와 왕래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분단체제를 한국사회 부조리의 근원으로 여기고, 그 체제를 불러온 강대국, 특히 미국을 비판하던 담론도 있었다. 이 담론을 순진하게 확장하면 ‘외세를 배격하고 우리 민족끼리’가 된다. 우리가 서구에서 들여온 민주주의, 자유주의도 그 ‘외세’에 포함되는 것일까? ‘민족 자주’는 민주주의에 앞서는 가치일까?

남한의 자본과 기술, 북한의 노동력과 지하자원이 결합하면 ‘대박’이라는 담론도 있었다. 그러면 자유무역협정과 관세동맹 협상은 열심히 하되, 정치범 수용소 이야기는 되도록 삼가는 게 현명할까? 남한의 자본이 북한의 노동력과 결합할 때 남한의 저임금 노동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30년쯤 뒤에 한반도가 어떤 모습이길 바라는 걸까? 통일 대통령과 통일 국회가 있기를 바라는가? 주체사상탑은 그 이름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하나? 젊은 여성이 다 남쪽으로 내려갔다며 북한 총각들이 울분을 터뜨리게 되는 시나리오는 미리 막아야 할까?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평화와 통일, 경제와 공화(共和)가 충돌할 때 어떤 가치를 좇아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답을 해줄 새로운 담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 담론의 청사진을 여기서 소상히 그려낼 능력은 없다. 다만 두 가지 조건은 갖춰야 하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하나는, 새 담론이 개인의 삶과 연관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한반도가 좋은 미래로 가는 과정은, 내가 좋은 삶을 사는 길이기도 해야 한다. 남북화해 협력은 한반도에서 사는 개개인에게 이익이어야 한다. 또한 특정 계층의 희생을 바탕으로 총합이 더 커지는 노선이라면 지름길이라도 거부해야 한다.

‘좋은 삶’은 경제적 문제인 동시에 도덕적 문제이기도 하다. 세월호가 가라앉았을 때 우리는 좋은 삶을 누릴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요덕수용소가 있는 한 우리가 좋은 삶을 누리긴 어렵다. 서울에서 요덕수용소는 팽목항보다 가깝다.

새 담론은 그렇게 개인의 삶과 연결된 동시에 세계와도 연결돼야 한다. 한반도의 지정학에서 벗어나 다른 지역의 국제분쟁, 빈부 격차, 난민 문제에도 적용할 수 있는 보편가치, 인권 철학이 담겨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우리의 목소리에 다른 나라에서도 귀를 기울인다. 협상 당사자로 나서야 하는 정부는 이 문제에서 운신의 폭이 좁다. 시민사회의 역할이다.

우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호랑이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다. 우리가 마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재갈은 도덕적 정당성이라고 생각한다. 튼튼한 재갈을 채운 뒤에도 호랑이 등 위에서 한참 힘을 겨뤄야 할 듯싶다.

장강명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