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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월요인터뷰

일본 '매니페스토 전도사' 기타가와 마사야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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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기타가와 마사야스 전 미에현 지사는 ‘일본 매니페스토 운동의 전도사’로 불린다. 그는 "매니페스토 운동을 통해 한국이 정치 개혁을 이루길 바란다"고 말했다.
[도쿄=예영준 특파원]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매니페스토 운동이 활발하다. 후보들이 앞다퉈 내놓는 공약에 언론과 유권자들도 과거보다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매니페스토가 인맥.지연 위주의 선거문화를 바꾸고 정치 개혁을 앞당길 것이라는 기대도 높다. 이웃 나라 일본은 3년 앞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2003년 4월 지방선거와 11월 총선에서 매니페스토 운동이 확산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운동을 주도했고 지금은 매니페스토연구소를 설립해 공약 검증 활동을 펼치고 있는 기타가와 마사야스(北川正恭.61) 전 미에(三重)현 지사를 만나 일본의 경험과 한국에 주는 조언을 들었다.

만난 사람=예영준 도쿄 특파원

-'매니페스토 전도사'로서 이 운동의 개념을 다시 한번 설명해 주십시오.

"유권자에 대한 약속이란 의미에서, 검증 가능하고 체계적인 공약을 말합니다. 그러려면 기한과 재원, 수치 목표가 제시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언제까지(기한), 어떻게(재원) 그리고 어디까지(수치 목표) 약속을 지킬지를 명확히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정책의 대전환을 실천할 수 있는 비전이나 이념을 명확히 보여야 합니다. 그 바탕 위에 구체적이고 실효적인 수단을 제시할 때 비로소 매니페스토가 됩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일본에서 가장 먼저 매니페스토를 발표한 사람은 마스다 히로야(增田寬也) 이와테(岩手)현 지사입니다. 그는 2003년 지사 선거에서 공공사업을 임기 중 매년 15%씩 줄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재정 개혁이란 이념을 구체화한 것인데, 지역주민이 싫어할 수도 있는 공공사업 감소를 선거공약에 포함시킨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대신 그에 따른 구체적인 고용대책을 세워 긴급 과제로 함께 제시해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일본에선 2003년에 당신 주도로 매니페스토 운동이 활발히 펼쳐졌는데, 그로 인해 선거문화가 어떻게 달라졌는지요.

"예전의 일본 선거는 정책 대결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참다운 의미에서의 공약은 찾아보기 힘들고 선심성 구호만 넘쳤습니다. 누가 들어도 좋은 말만 넘쳐났습니다. 구체성이 없으니 나중에 공약 실천 여부를 검증할 수도 없었죠. 나는 이를 '오네가이(잘 부탁드립니다)' 선거라 부릅니다. 후보자는 언제 어딜 가든 유권자들에게 그저 이 말만 반복했으니까요. 매니페스토의 도입으로 선거문화가 '부탁 선거'에서 '약속 선거'로 바뀌고 있습니다. 특히 지방에서 정착이 빠릅니다. 일본은 최근 1~2년 새 지방자치단체들의 합병으로 곳곳에서 선거가 많았는데 현장에 직접 가 보면 대체로 60~80%는 매니페스토 위주의 선거가 되고 있습니다. 아직도 가방(돈), 지연, 간판(학력.경력) 위주의 선거가 남아 있지만 큰 흐름은 이미 바뀌었다고 봅니다."

-과거 선거가 정책 대결이 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무래도 민주주의의 역사가 짧기 때문이겠죠. 서양에선 이미 1830년대부터 매니페스토 선거가 시작됐는데 오랜 세월을 거쳐 폭력.매수 등 부정적 요소들을 극복했습니다. 일본에선 특히 중선거구제가 정책 선거를 가로막았습니다. 한 선거구에서 여러 명을 뽑다 보니 실제로 10%대의 지지율로도 당선됐거든요. 그러다 보니 우체국.농협 등 이른바 조직표를 확실히 잡고 거기에 친지 표만 모으면 당선되는 겁니다. 자연 공약도 특정 조직을 위한 것이 많았고, 유권자 전체를 위한 정책 공약이 뿌리내리지 못했던 거죠. 그런 점에서 1996년 소선거구제로 바꾸면서 매니페스토의 기초가 닦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도 비슷한 과정을 거치고 있지만, 일본은 2003년 4월 지방선거에서 시작해 11월 총선거로 매니페스토 운동이 확대됐습니다. 그 과정에 어려운 점은 없었습니까.

"당시로선 매니페스토 운동은 기존에 없던 가치를 새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벤처사업이나 마찬가지였죠. 기존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던 권력자들이 좋아할 리 없었지요. 처음엔 집권 자민당의 반응도 냉담했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방향성이 있었습니다. 선거를 국민과의 약속으로 삼자는 데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언론도 그런 취지를 잘 이해하고 집중적으로 보도함으로써 빠르게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도 언론의 역할이 클 것으로 봅니다."

-당시 일본에선 매니페스토 정착을 위해 선거법까지 개정했는데.

"일본의 선거법은 기본적으로 이건 안 된다, 저건 안 된다는 식으로 금지 조항을 죽 나열한 법률입니다. 당시 선거법으로는 공약집 배포도 위법이었습니다. 매니페스토 위주의 선거가 애당초 불가능했죠. 그래서 공약집 배포가 가능하도록 선거법 개정 운동을 벌여 이를 관철시킨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선거기간이 정해져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상한 일입니다. 평소에는 정책 공약을 얘기하면 안 된다는 것이니까요. 정보기술이 이렇게 발달해 있는데 인터넷을 통한 선거운동을 금지하는 것도 시대와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선거가 끝난 뒤에는 어떻게 매니페스토 운동을 계속해 나가야 할까요.

"공약을 발표하는 것보다 검증이 더 중요합니다. 원론적으로는 의회가 최고의 검증기관입니다. 감사기관도 있죠. 하지만 일본에선 그런 기능이 충분히 작동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검증 주체는 학자나 전문가, 시민단체 등입니다. 나는 2003년 이후에는 매니페스토 검증 시스템을 만들고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조직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현재 지방의원 500명이 우리 네트워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집권당의 공약은 내가 소속한 단체인 지식인.전문가들의 기구인 '린초'에서 하고 있습니다. 집권당이 지난 총선 때 내건 공약이 얼마나 실현됐는지를 수치화해 다음 총선을 앞둔 시점에 발표합니다. 지방단체장들의 공약은 와세다대의 매니페스토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네트워크를 통해 이뤄지고 있습니다. 연구원들을 현지에 파견, 공약 하나하나가 얼마나 이행되고 있는지를 채점합니다. 지난해 9월 매니페스토 검증대회를 열고 현 지사 5명의 성적표를 공개했습니다. 이와테현 마스다 지사 88점, 가나가와(神奈川)현 마쓰자와 나리후미 지사 81점, 그런 식이었죠. 언론들도 이를 크게 보도했습니다."

-끝으로 한국 정치인들과 유권자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매니페스토는 후보자와 유권자 사이의 계약입니다. 후보가 제시한 계약서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유권자가 선택하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유권자들에게도 큰 역할이 있습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이 운동이 큰 효과를 보면 내년 대통령선거로도 이어질 것입니다. 매니페스토는 굳이 일본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정치 개혁의 큰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일본의 경험이 필요하다고 하면 적극적으로 협력할 용의도 있습니다."

도쿄=예영준 특파원


기타가와 마사야스 전 미에현 지사는 "매니페스토는 공약 자체보다 검증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가 이끄는 매니페스토연구소는 당선된 각 지방단체장의 공약 이행 여부를 철저히 검증하고 있다. 위의 표는 2월 매니페스토 운동에 동참하는 단체장들의 연수회에서 발표된 기후현 다지미시 니시데라 마사야 시장의 매니페스토 평가표 일부. '공원 녹지 정비'란 사업 항목에서 내건 구체적 공약에 대해 조목조목 별표를 매겨 채점했다. "공원.공공시설 20곳을 녹화하겠다"던 공약은 지난해 8월 이미 41곳의 녹화가 끝나 '목표 달성'을 의미하는 별 5개를 받았다. 별이 적을수록 공약이 지연되고 있다는 뜻이다.


기타가와 마사야스는 …

지사 출마 포기 매니페스토에 주력

기타가와 마사야스 전 미에현 지사는 일본에서 매니페스토 운동의 전도사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2004년 1월 한 심포지엄에서 당시로선 생소했던 매니페스토의 도입을 주창했다. 그는 당선이 확실시되던 지사직 출마를 포기하고 이 운동에만 주력하겠다고 선언했다.

그의 주장에 언론과 지식인.학계.경제계가 뜨겁게 호응했다. 석 달 뒤 실시된 11개 현의 지사 선거에서는 14명의 후보가 매니페스토를 발표했고 그중 6명이 당선했다. 기타가와의 예언대로 매니페스토 열기는 11월 총선거로 이어져 자민.민주.공명 등 각 정당이 앞다퉈 책임 있는 공약을 발표했다.

당시 총선에서 민주당이 자민당을 위협할 정도로 약진할 수 있었던 것은 매니페스토에서 앞섰기 때문이란 분석이 많았다. 당시 언론들은 이 운동을 '정권 공약'운동이라고 번역해 원어와 함께 사용했다.

기타가와는 이후 와세다대에 설립된 매니페스토연구소의 소장으로 취임해 지금까지 공약 검증 활동을 활발히 펴고 있다. 그는 "당초 지방에서 성공 스토리를 만들어 중앙정치로 확산시킨다는 복안이었는데 돌이켜 보면 그대로 적중한 것 같다"고 말했다.

1944년생인 그는 와세다대를 졸업한 뒤 미에현 의원에 세 차례 연속 당선한 뒤 중앙 정계로 진출해 중의원 4선을 기록했다. 문부성 정무차관을 거쳐 95년에는 다시 지방으로 무대를 옮겨 4년 임기의 미에현 지사에 2회 연속 당선했다. 재임기간 중에는 주요 사업 평가 시스템을 도입하고 지역 내 원자력발전소 계획을 백지화하는 등 개혁적 리더로 인기가 높았다. 현재 각 분야 전문가가 정책 제언을 위해 결성한 '21세기 린초'의 공동 대표직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