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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북녘 시인에게」 「예프투셴코의 시 할머니에 붙임」|우리의 처절한 비극을 눈물겹게 그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88년 한해는 우리가 짊어진 비극적 존재조건을 가장 쾌활한 방식으로 확인하면서 그 아픔의 나머지 속살들을 표면화한 해였다. 서울에서 치른 올림픽이 그렇고, 그런 시침뗀 만남들을 계기로 영영 봐선 안될 얼굴들로 믿었던 사람들과 서로 만나기도 하고, 장사도 하며, 사랑도 해보자고 손들을 내미는 몸짓들이 여기서 저기서 불쑥불쑥 그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였다.
신기하고도 어리둥절한 시절로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많은 시인들은 시선을 자기 존재에 딱 고정시킨 채 자기 노래만 불러 시침떼기 전법으로 존재 지키기에 열심인가 하면 목소리에 힘을 주면서 통일과 화해를, 처벌과 용서를 노래 불러 자기 개인이 가장 넓은 민족의 가슴속에 있음을 알리고자 하기도 했다. 살고 있는 모든 생령들이 다 자기 표현의 자유가 있으니 하물며 시인들에게 있어서는 어떠하랴.
박남철의 「젊은 북녘 시인에게」(『한국문학』12월호)와 곽재구의 「예프투셴코의 시 할머니에 붙임」(『현대문학』12월호)을 나는 이야기하기 쉬운 시, 내용이 있는 시, 그리고 무엇보다도 눈물겨운 시라고 보았다.
적성국가 소련의 시인 「예프투셴코」가 한국에 왔고 그가 「시골 농가에서/한국의 할머니를」 큰 폭으로 끌어안는 사랑의 몸짓을 보여 감동을 주었지만 과연 그가 아무리 이름난 시인이기로 정말로 자기가 끌어안은 한국 할머니의 찢어진 영혼의 아픈 내용들을 알기나 했겠는지, 그리고 그 책임의 일부가 그에게도 원죄처럼 있을 수 있었음을 알기나 했겠는지 묻고 있는 이 시인의 시적 항변은 엉킨 내용의 관계들이 신기하고 또 정당하다.
『포연과 철조망과/새가 되고픈 형제들의/무수한 찢김/…당신이 끌어안은/할머니의 아들 하나가/지금은 토치카가 되어버린 철모 곁에/진홍빛 산꽃으로 피어 있고』 또 그녀의 한 인척은 북녘에 살면서 『하루에도 열 번/남녘으로 가는 바람결에/가을 산꽃을』 실어 보낸다.
가락이 좀더 냉정했더라면 더욱 돋보였을 작품이다.
박남철의 「젊은 북녘 시인에게」는 처절한 비극의 눈물 장치가 깔린 시다.
『도서출판 「푸른 숲」의 청탁 있어/「젊은 북녘 시인에게」/편지 쓴다./젊은 북녘 시인 동무,/그런데 젊은 북녘 시인동무……』
그렇게 적어놓고 봐도 젊은 북녘 시인 동무의 얼굴이 도무지 떠오르진 않고 「동무는 반동이야! 날래 걸으라우. 이 종간나쌔끼!」라는 엉뚱한 기억 저편의 동무만 머리에 떠오른다. 민족분단 40년 동안 찢어진 정신 두 쪽이 등을 돌린 채 서있는 모습이 선연하다.
정신의 내재적 완결성을 꿈꾸는 우리들의 처연한 모습에 다름 아닌 그것은 너무 아프다. <정현기(연세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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