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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말끝마다 "남조선 인민" 구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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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본사 이찬삼 시카고 편집국장 방문기
북한의 인민들은 남한을 너무도 모르고 있었다.
나이가 젊을수록 더 심하게 왜곡된 교육에 젖어 있었으며 『하루속히 미국으로부터 남조선 인민들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아울러 북한을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손색없이 잘 사는 나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외부세계와 접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방적인 교육만 받고 자라온 북의 젊은이들은 기자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갈등의 눈?을 보이기도 했다.
평양방문 이틀째인 12월10일 안내원과 함께 대형식당 「청류관」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사랑도 노래하나"
특실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기타 소리가 들려 나가봤더니 주방 쪽 복도에서 6∼7명의 「접대원 동무」,(웨이트리스)들이 모여 앉아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쉽게 말이 통해 함께 기타를 치며 대화를 나누던 중 한 아가씨가 기자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은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해 보셨읍니까?』 라고 물었다.
『그러시다면 우리 조국처럼 아름답고 잘 사는 나라를 보셨읍니까?』
강성희라는 이름의 이 아가씨도 예외 없이 「위대하신 수렁 김일성 동지」를 얘기하며 모두가 골고루 잘사는 북한이 지상낙원이라고 믿고 있었다.
『헐벗고 굶주린 남조선 인민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쓰라린다』고 말한 강양은 기자의 요청에 따라 손수 기타를 치며 노래 한 곡을 불렀다.
「밤하늘에 눈이 나리네. 고요한 밤하늘에 내리는 눈송이여. 따뜻한 송이송이 가슴 위에 내리네…」
강 양이 부른 노래는 발라드 풍의 아주 정감 어린 멜로디로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를 노래한 가사에 붙인 것이었다.
강 양이 기타로 전주를 시작하자 함께 있던 접대원동무 전원이 자연스럽게 합창을 했다. 이어 그들의 요청에 의해 하는 수없이 기자도 양희은의 「한사람」을 답송으로 불렀다.
『먼홋날 지나 내미는 손…둘이 서로 마주 하며 웃네…』라는 가사의 이 노래를 들은 아가씨 중에 한 명이 『노태우 노랩니까』라고 물었다.
『이루지 못한 연인들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라고 하자 그들은 신기한 듯 질문을 계속했다. 『사랑은 개인적인 것인데 인민들이 노래로 부른답니까?』
『주체사상도 없이 사랑을 노래한단 말입니까?』 『미국놈들의 노래 아닙니까?』등 그들 세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남한 왜곡한 영화
그러나 이날 식사도 마다하고 나눈 젊은 여성들과의 대화에서 기자는 많은 것을 생각했다.
지금껏 듣고 배워온 단 한가지 「위대한 김일성 수령동지와 지상낙원」 오직 그것만이 존재하는 이 사회도 약간의 개방물결이 일고 또한 개방의 그 미풍이 스치면 걷잡을 수 없이 변화하겠구나 하는 확신이었다.
앞서 이야기 한대로 그들도 이제 연애결혼을 하고 개인적인 사랑도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사랑의 체험을 노래하는 가요는 없다. 그들이 직접 부딪치는 실연의 아픔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아픔을 묘사한 노래는 듣지 못했다.
기자가 노래한 「한 사람」. 그 가사에 놀란 그들의 표정은 겉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반발하고 있었으나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었다. 우리의 그 노랫말에 순간 순간 가슴이 뛰는 모습을 기자는 보았다.
평양서 기차로 4시간 거리인 평안북도 구장군 개천지구를 방문했다. 만난 대학생 조모군(21)도 마찬가지였다.
우연히 그와 함께 TV를 보고 있었는데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사건」을 극화한 『어머님의 소원』이란 영화가 방영되고 있었다.
북한의 인기배우 강여선·김철·박금실 등과 일본 조총련계 배우들이 공연한 이 영화는 2년 전 제작됐으며 크게 히트한 것이라고 한다.
북한의 젊은이들도 배우·가수·아나운서 등 인기인에 대한 관심도가 대단했다.
함께 있던 조 군에게 주연배우들의 이름을 묻자 영어단어를 암기하듯 출신, 히트영화, 데뷔시기, 가족관계 등을 소상히 얘기했다.
『어머님의 소원』 영화는 지독하게 남한사회를 왜곡, 성조기 머플러를 목에 두른 젊은이들이 디스코클럽에서 탈선하는 것과 미군이 유부녀를 대로에서 희롱하는 것 등을 내용으로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용접기로 불고문하는 장면도 나왔다.
조 군은 기자와 함께 이 영화를 보며 잔혹한 장면들이 나올 때마다 흥분했다.
『저럴 수도 있읍니까? 저런 짐승 같은 놈들….』
미군들이나 관리들이 일반 시민들을 괴롭히는 내용들이 화면에 나을 때마다 조군은 소리쳤다.
『학생, 저 영화의 장면들은 사실과 다릅니다. 남조선은 그렇지 않아요』
1시간 반 동안 영화가 계속되는 동안 나는 조 군과 대화했다.
그는 계속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으나 어느 정도 기자의 말을 받아들인 듯 『영화는 예술이잖습니까』라는 말로 스스로의 일방적인 생각을 수정하는 듯 했다.
평양시내 만수대 예술극장 앞 분수대 앞에서 만난 대학생 김모군(22)도 같은 반응이었다. 『우리 조국의 협조 없이 올림픽 치르는데 혼이 났지요』라고 말문을 연 김 군은 남쪽을 형편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소방서 없는 평양
『「이산가족 찾기」취재차 서울을 방문했던 북한기자가 평양TV에 나와 말한 내용을 기억한다』는 김군은 『병든 남조선 인민들이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끼니를 잇지 못해 배를 움켜쥐고 사는 동포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며 조속한 통일을 희망했다.
상당한 수준으로 알려진 제2의 안내원(최형무씨와 다른 인물)과 기자와의 대화에서도 그들이 얼마나 남쪽의 실상을 모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남조선 살림집(아파트)에 불이 났다고 합시다. 그 불은 누가 끕니까?』
『소방서 차량이 동원돼서 끄지요.』
『인민들은 그럼 가만히 보고 있답니까?』
『일반시민의 노력보다 소방차가 와서 물을 뿜으면 더 쉽게 끌 수 있지요.』
『우리 조국의 인민들은 일심단결하여 스스로 불을 끄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금도 필요 없고 소방차도 필요없습니다. 세금받아 불만 끕니까』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곳곳을 다녀봐도 평양에서 소방서를 본 기억이 없다.
사소한 작은 일들에서조차 남한은 지옥이며 북조선은 세계 어느 곳 보다 살기 좋은 낙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통일이란 말을 입버릇처럼 쓰고있으나 그 통일의 이유를 「남조선 인민의 구출」과 연결해서 생각하고있었다.
중학교 학생들로부터 기성세대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만날 때도 통일, 헤어질 때도 통일을 당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당부는 진지하고 심각했다.
『선생님 돌아가시면 우리 조국의 통일을 위해 힘껏 싸우시기를 굳게 믿습니다.』
『선생님 조국통일을 위해 좋은 글 많이 써 주세요.』
기자는 이런 인사를 수 없이 듣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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