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노사분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노사문제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두 번째 해인 88년은 적잖은 노사분규가 1년 내내 꼬리를 물었으나 대체로 87년보다 노사 모두 성숙된 모습을 보인 한해였다.
88년 벽두 서울 멕스테크사 위장폐업철폐운동, 울산현대엔진 노조사수운동으로부터 시작된 노사 갈등은 4, 5, 6월의 대우·현대계열사 등 대기업의 파업으로 치달았고 공무원인 철도기관사파업, 언론기관·연구소·병원노조 파업 등으로 이어지며 많은 교훈을 남겼다.
그러나 올해의 노사분규는 87년 하반기에 비해 폭력양상이 크게 줄고 쟁의가 준법화 됐으며 화이트 컬러 노조의 활동이 두드러졌다는 것을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분규건수에 있어서도 87년 하반기에는 3천6백25건이 폭발적으로 발생했으나 88년에는 1년 동안 1천8백 여건이 발생, 빈도가 줄면서 협상에 의한 분쟁해결 관행이 느는 현상을 보였다.
87년의 철도점거·시청난입·방화와 같은 과격양상은 현저히 사라지고 노동법의 현실화에 따라 적법절차를 지키며 권리주장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87년 하반기에는 46건만이 쟁의신고를 거쳤고 합법쟁의는 7건에 불과했으나 88년에는 90% 이상의 분규가 신고절차를 거쳤고 완전 합법쟁의도 3백80건이나 됐다.
대우조선 등 많은 노조는 냉각기간 중 「준법투쟁이라는 새로운 방식을 개발해 집단외출, 식당 한곳만 이용하기, 일시에 화장실 가기 등으로 폭력 없이 압력을 행사하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정공(울산)의 회장 감금사건, 부산건축사노조의 폭력사건, 대한광학(서울) 미미양행(인천)등 20여개 기업의 구시대폭력처럼 노사간에 불법행동이 여전히 남아 아쉬움을 남긴 한해이기도 했다.
또 노사분규와 관련해 강원탄좌의 성완희씨, 성남 고려피혁의 최윤범씨 등 7명이 1년 사이에 분신·음독 자살하고 현대엔진의 청원경찰이 숨지는 등 비극도 거듭됐다.
회사 간부의 사주로 발생한 현대건설 서정의 노조위원장 납치사건처럼 기업의 잘못된 노조관에 경종을 울린 사건도 있었다.
올해 분규는 자동차·기계·철강·전기전자 등 기간산업에서 유난히 많았고 분규도 장기화돼 기업의 생산차질이 87년보다 더 많았다. 87년 하반기의 평균 조업단축일수는 5·4일이었으나 올해 6월의 경우 9일이나 됐다. (주)통일은 석 달, 현대자동차는 40여일의 조업중단을 기록했다.
이 같은 사태로 인해 사용주들도 적극적인 대처방식을 쓰기 시작, 전에 없던 직장폐쇄· 휴 폐업·「무노동 무임금」 원칙 관철 노력이 나타났다. 4월의 대우조선을 시발로 노사분규에 대해 올 들어 무려 1백85개 기업이 직장폐쇄 신고로 대응했고 콘티넨탈식품 등 19개 기업은 아예 폐업해버렸다.
대우그룹 등에서는 쟁의기간중 외 임금은 지급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였다.
근로자 쪽에서는 연대활동이 두드러진 한해였다. 5공화국 초 강요된 기업별 노조체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지역별·업종별로 손을 맞잡고 나선 것이다.
인천 한독금속, 마산 TC전자 등의 분규에 대한 지원활동에서 비롯된 연대활동으로 현재 서울·마산 창원·인천·성남·전북·광주·진주·부산 등 8곳에 지역노조협의회가 결성돼 노동법개정·노조탄압저지 등에 공동 대처하고 있다.
신생·「민주」 노조 중심의 이 협의회들은 노총의 통제권 밖에서 움직이고 있어 노동계의 다원화와 질서개편을 촉진하고 있다.
또 업종별로도 연구전문기술노조협·대학노조협·정부투자기관노조협·외국기업노조협 등 9개 협의회가 결성돼 활동중이다.
노총의 산별 노련도 분화현상이 나타나 연초 16개 산별에 언론·병원노련 등7개가 추가돼 23개로 늘어났다.
올해에는 특히 화이트칼라 노조가 쟁의를 벌이는 못 보던 풍경도 많아졌다.
언론사상 처음으로 부산일보· MBC·충청일보 등 노조가 파업을 벌여 편집국장 추천제 등 합의를 이끌어냈고 연구소의 연대파업, 병원· 대학의 파업도 잇달았다.
노사문제 취약 12개 대기업이 노동부의 특별근로감독을 받는 등 기업에 대한 노동부의 감독이 대폭 강화된 해이기도 했다. 노사분규의 회오리가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계속 몰아쳤지만 근로자·사용주의 성숙된 의식으로 인해 분규해결의 전망을 보다 밝게 해준 한해였다.<김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