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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면에서 계속|"공수요원 가장하곤 공격했나" "카빈 사망자 군이 쏜 것 아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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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소준열씨 증언
-최규하 대통령이 내려온 것은 언제인가.
『26일 17시30분쯤이다.』
-증인은 그 자리에서 최 대통령에게 불가피하게 작전을 하지 않을 수 없음을 보고했다는데.
『2백∼3백 명의 강경파에 의해 80만이 희생될지도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가능하면 안 해야겠지만 물가피할 경우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했다.』
-자위권은 총알을 나눠주며 발포 명령하는 것 아니냐.
『그렇다.』
-누가 최초로 명령했나.
『모른다.』
-전북지사로 있던 김학중씨에 따르면 계엄분소장이 하루에 시체 5백구를 화장할 수 있는 화장장의 제공을 전화로 요청했다는데.
『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 대질하면 알게 될 것이다.』
◇정동호 의원(민정) 신문
-교도소 습격은.
『광주교도소의 재소자는 사상범 1백17명 포함, 2천7백여 명이었다. 내가 부임 전에 네 번, 부임 후 두 번의 습격이 있었다. 10명 내외 인원으로 교도소를 습격한 건 이해가 안가지만 습격행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해찬 의원(평민) 신문
-80년 5월 24일 오후 2시 광주개방대학 뒤 송암동에서 공수부대와 증인의 전투병과 교육사령부 병력간에 교전이 있었는데 어느 쪽이 먼저 쏘았나.
『전교사 보병학교 측이 먼저 쏘았다.』
-몇 명이 죽었나.
『9명이 죽고 40여명이 부상했다.』
-대포에 가까운 무 반동 총으로 선제공격을 한 것도 자위권발동으로 볼 수 있나.
『당시 보병학교 측은 시민군이 나오고 있다는 정보보고를 받았다.』
-자위권발동을 누가 명령했나.
『대대장이 했다.』
-상급자의 허가는 없었나.
『승인 없이 했다. APC(장갑차)는 공수부대에는 없고 시민군이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으로 알고있다.』
◇박태권 의원(민주) 신문
-소장인데도 호남 인인 증인을 사령관으로 택했는데 지방색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초기단계에서 공수부대가 과격했던 것은 부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광주가 정치·경제적으로 소외돼 시민 중에 지역감정을 느낀 사람이 있었다고 본다.』
-이학봉·허삼수씨 등이 광주에 오지 않았는가.
『이학봉 씨는 만났다. 연행자 처리문제 등 자기들의 업무를 위한 것이었다. 업무가 바빠서 그런지 나에게는 그때그때 보고하지 않고 끝나고 보고서만 가져왔다.』
◇이광노 의원(민정) 신군
-광주민주화운동의 격화가 과잉진압 때문이라는데.
『과잉진압이라는 말에 군에서는 거부감을 갖고 있으나 확산원인은 공수부대의 과격행위에 있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공수부대가 가만히 있는데 그런 게 아니고 학생들이 자극했기 때문이다.』
◇최봉구 의원(평민) 신문
-공수부대 과잉진압을 막지 못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각급 부대 지휘관이다.』
-최종 작전회의 후 기도비밀을 위해 작전을 무기 연기한다고 했는데 누굴 못 믿어서인가.
『각급 학교병력과 사단병력이다. 가족에게 연락해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31사단에 최종 진압작전명령을 언제 하달했나.
『5월 27일 새벽 2시다.』
◇장석화 의원(민주) 신문
-민화위에서 적색분자의 증거로 독침사건을 예로 들었는데.
『조사한 바는 없으나 온건파학생이 강경파학생으로부터 나오기 위해 말한 것으로 안다.』
-군인들간의 오인사격으로 죽은 피해자는 누가 책임지나.
『궁극적으로 내가 진다.』
-정호용 사령관·최웅 장군이 오인사격 현장에 있었는가.
『그분들은 먼저 갔고 나는 나중에 갔다. 정 장군이 사령부로 와 보병학교 병력이 11공수를 죽인다고 해 헬기를 타고 가 보았다.』
◇박찬종 의원(무) 신문
-22일 10시 작전지휘권을 인계 받은 후 천주교 광주교구 윤공희 주교로부터 전화를 받았나. 그 내용은.
『국민의 군대가 같은 국민을 이렇게 무자비하게 대할 수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20일 밤 정웅 장군은 자신휘하에 배속된 3개 공수여단에 무혈진압 명령을 내렸다는데 사실인가.
『틀림없다.』
-전교사 작전일지에는 하루 1인당 59발로 70여만 발의 실탄이 소요된 걸로 돼있는데.
『하루 1만2천명의 병력은 행정병력까지 포함한 것이다. 특히 22∼26일은 작전도 없었다.』
◇박희태 의원(민정) 신문
-광주에서 사망한 28명은 카빈에 의한 것이라는데 이들은 계엄군에 의해 사망한 것이 아니라는 게 맞는가.
『맞다. 현역군인에겐 카빈이 없다.』
◇김영록 의원(평민) 신문
-5월 항쟁 기간 중 무장헬기가 현장에 출동, 사격을 가한 사실은.
『교훈 집에서 알게됐는데 항공단에 공격용 헬기 지원을 요청했으나 표적이 부정확하고 민간인이 많아 사격을 가하지 못했다. 그러나 본인이 부임한 후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
-공수부대 정보요원이 가발과 편의 복을 착용하고 광주시민을 공격, 작전강행의 구실을 만든 게 아니냐.
『당시 도청에는 학생수습위원회가 있었고 외부에서 불순책동분자가 도청에 들어왔다면 학생들이 잡았을 것이다.』
-보안사장성이 보안사령관을 대리해 현지에서 사사건건 지시한 뒤 25일 정호용 장군과 서울에 올라와 상무충정작전을 결정했다는데 이름은.
『최예섭 준장이다.』
◇이인제 의원(민주) 신문
-부임 후 정호용 사령관을 몇 번 만났나.
『3번이다.』
-25일 조만간 진압작전을 한다는 말을 했는가.
『그런 말을 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3공수를 특공 조로 활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광주에 올 때 정호용 사령관이 혼자 내려왔는가.
『작전참모 장세동 대령을 가끔 대동했다.』
-최예섭 장군은 몇 차례 만났나.
『서너 번 만났다.』
◇신경식 의원(민정) 신문
-정호용씨가 작전 관여했는가.
『특전사문제에 대해 상의한 적은 있으나 기동작전·행동시간은 내가 결심했다.』
-미국 측이 관여했는가.
『23일까지인지 기억이 정확치 않지만 미 해·공군 증원 시까지 작전을 중지하라는 얘기 외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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