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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본사 이찬삼 시카고 편집국장 방문기|「남조선 기자」에 자연스럽게 대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북한은 분명히 개방사회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 분단 43년만에 한국의 신문기자를 처음 입국시킨 것부터 개방의 징조를 보였지만 평양에 첫발을 디딘 순간 모든 것이 생각했던 고정관념보다는 차이가 있었고 개방의 작은 물결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남조선 기자」에게 취재 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편의를 제공해 주었고 거리에서 만난 주민들도 「남조선에서 온 기자」라고 했는데도 피하거나 적대감을 갖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꾸해 줬다.(북한에선 남한·북한이란 단어를 쓰지 못함)
양장차림에 눈썹 가를 족집게로 뽑아 가지런히 다듬는 화장법이 유행하고 있었고 긴 굽 끝에 놋쇠장식이 부착된 하이힐과 긴 부츠를 신은 여성이 많이 눈에 띄었다.

<취재편의도 제공>
북한에도 혼전관계로 임신한 미혼모가 있었고 길가에 방뇨하거나 술에 취해 지하도에 쓰러져 있는 취객도 있어 『여기도 사람이 사는 곳이구나』라는 생각을 다졌다.
한마디로 북한에서의 1주일은 새로운 경험의 연속이었다. 긴장과 흥분과 설렘이 교차했던 1주일….
개방사회로 눈을 뜨는 한편으로는 분단 43년이 벌려 놓은 남·북한 사람들의 사고방식의 차이가 너무나 크고 깊음을 새삼 느꼈다.
국방색 누비옷을 입은 노동자들을 만나 『일이 고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위대한 김일성 수령님의 은덕에 보답하고 조국을 위하는데 무슨 소리냐』고 웃으며 답하는 것이었다.
분명 평양은 개방과 폐쇄가 공존하는 사회였다.
두려움과 흥분이 교차하는 가운데 금단의 땅, 평양행 중국민항이 북경을 이륙한 것은 12월9일.
승객 수는 대충 40여명 남짓. 이 가운데 10여명이 김일성 배지를 달고 있어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리는 불안을 억제하고 있는 가운데 기내 스피커에서는 귀에 익은 경음악 『진주 조개 잡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왜 그런 짓 하나">
기내 분위기를 수첩에다 적고 있는 기자를 흘끔흘끔 쳐다보는 낯선 승객들과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는 노력도 잠깐뿐.
『총련(조총련) 이십니까』라고 말을 걸어오는 옆자리 승객의 질문에 깜짝 놀란 기자는 『아 재미교포입니다』라고 답했다.
관광총국소속 일어 통역 인이라는 그 북한 인은 40대 초반으로 보였으나 33세라고 했다.
정장차림에 금테안경을 쓰고있으면 대개 재일 교포로 알고있었는데 의외라고 그는 말했다.
그와 몇 차례 대화가 오간 뒤 처음으로 대담한 질문을 해보았다.
『김현희 양 알고 있습니까?』
『김현희가 누구입니까?』
특별히 「누」자에다 액선트를 준 그의 반문에 금방 대답이 나오지 않았던 것은 차마 「KAL기 폭파 범」이라는 소리를 입밖에 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한항공기가 떨어져 많은 승객이 죽었지 않았습니까 왜…』
『아, 그 사건 말 입네까? 바레인 말이죠?』
『네. 사건 발생 1년이 됐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합니까? 그리고 얻을게 뭐 있겠습니까? 우린 김현희 모릅니다.』
중국 민항기가 청천강을 가로지르며 착륙을 준비하자 목을 빼고 창밖에 펼쳐지는 농촌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등 또 다시 들뜨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엔 남쪽 고향 민둥산주변 시골과 다름이 없었다. 경지정리 된 논밭과 성냥갑 같은 민가가 보였다.
이때 레이다로 보이는 대형안테나가 설치된 트럭들이 나타나는가 했더니 『쿵』하고 비행기는 착륙하고 있었다.

<수첩 잃었다 찾아>
트랩을 내려가 북한 땅에 발을 내딛는 순간 참으로 묘한 감회를 받았다.
마중 나와 기다리는 관리들과 악수를 나누고 일행이 공항 청사로 향하고 있을 때 마중 나온 한사람에게 카메라를 건네주며 기념촬영을 부탁했다.
『청사 전체가 나오도록 하고 「평양」이라는 사인이 꼭 들어가게 해달라』며 설명하고 있을 때 드디어 일이 터지고 말았다.
무전기를 든 국방색 방한복차림의 병사가 갑자기 나타나 그를 밀쳐내며 소리를 쳤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어디서 사진 찍는 거요』라고 말했다.
이후 공항청사 내 VIP대기실로 들어갈 때까지 주눅이 들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입국수속용지를 받고 볼펜을 찾으려고 양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취재수첩을 비행기내에 두고 온 것을 알았다.
그 수첩엔 취재계획서와 각종 자료, 그리고 미주지사 전화번호·FAX번호 등이 적혀있었고 『비행기 창가로 모습을 드러낸 동토의 땅 북녘 땅-. 흥분과 두려움이 교차하다』라는 취재 메모도 적어놓았었다.
『큰일났구나』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호텔 여직원 발랄>
3백m 전방에 서있는 텅 빈 비행기를 향해 걸어가며 온갖 불길한 예감을 떠 올렸다.
조금 전에 소리치던 그 병사가 비행기내에서 기다릴 것 같은 불안감까지 엄습해왔다.
비행기 내에는 3명의 아주머니들이 비로 카핏을 쓸어내고 있었고 다행히 취재수첩은 내가 앉았던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북한 땅에 발을 디딘 최초의 한국기자」라는 감격은 간데 없이 첫날은 이렇게 불안한 해프닝으로 가슴 죄었다.
문제가 확대되고 우려대로 안전에 자신이 없다고 최종 판단될 경우 아예 공항에서 되돌아 가겠다는 각오까지 했었으나 숙소인 고려호텔로 돌아와서부터는 이 같은 불안이 점차 사라져갔다.
고려호텔에 근무하는 수십 명의 여자직원들은 평균연령이 20∼25세 정도로 하나 같이 말 잘하고 외모도 뛰어나다.
특히 지하실 바에서 일하는「접대원 동무」들은 서방세계 못지 않게 발랄하고 남자 고객들의 도에 지나친 농담도 잘 받아넘기는 등 능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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