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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낭만주먹 낭만인생 46. 자장면집 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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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90년대 초반 방수포 제조회사에 대표로 취임했을 때의 필자.

1980년대 중반 50대에 접어든 나는 취직은 포기하다시피 했다. 사실 가진 것 없고 특별한 기술도 없는 보통의 중년 남자들은 그렇게 살지 않았던가? 사업에도 자신이 없었다. 실패하는 데는 타고난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는 자괴감이 컸기 때문이다.

자금을 빌려주겠다는 선우휘 형님의 호의를 마다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80년대 후반 '다리'지에 썼던 내 글 제목이 '성공 난무 시대의 대(大) 실패남(男)'이었을까? 하는 수 없어 자장면집 운영을 나름대로 구상했다.

마침 자리가 난 곳이 경기도 안양. 동기는 간단했다. 화교(華僑)인 내 매제가 그 장소를 주선했기 때문이었다. 외국어대 교수였던 그는 틈틈이 농장에서 나를 거들어주던 듬직한 사람이다.

"잘 아는 화교 한 분이 자장면집을 운영해왔는데, 자기는 은퇴하고 가게를 임대할 생각이 있던데…"

그래서 함께 답사한 곳이 경기도 안양의 옛 역사 근처였다. 역세권인데다 380명을 수용할 수 있는 2층 건물이 마음에 들었다. 요리를 먹는 방만도 13개였다. 중국집 문을 연 게 방그레가 초등학생 시절인데, 이름을 '영흥관'이라고 지었다.

그런대로 마음은 편했으나 번거로웠던 것도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주방장들이 종종 속을 썩인다는 점이다. 그거야 내가 주방에 뛰어들어가 팔을 걷어붙이면 급한 불은 끌 수 있었다. 곁가지 얘기이지만 그런 경력 덕분에 나는 중국요리를 제법 할 줄 안다.

훗날 중국 칭다오에서 대표이사 노릇을 할 때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일테면 외국에서 향수병을 푸는 좋은 방법이 한국음식을 푸짐하게 먹는 것인데, 직원들이 한국타령을 하면 나는 후딱 부엌에 들어갔다. 어쨌거나 영흥관의 단골은 선우휘.이부영.백기완 등이었다. 선우는 인상 좋은 운전기사가 모는 차를 타고와 매상을 올려줬다.

"형씨, 나를 알아두는 게 좋을 걸."

"사장님, 용돈 한 30만원만 주시지?"

은근히 골치 아픈 또 하나의 일은 툭하면 손을 벌리는 동네 불량배들이었다. 지금이야 많이 정리됐겠지만, 하루에도 두세 명은 들이닥치게 마련이었다. 대충 타일러 보냈지만, 정 말을 안 들으면 힘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그런 험한 밥장사에 불안해 했지만, 별 도리가 없어 그럭저럭 세월을 죽이던 판에 뜻밖의 제안이 들어왔다. 사장 겸 공장장으로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생각해 볼 만했다. 6년 만에 자장면집에서 손을 뗀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배추형. 그 좋은 얼굴을 자장면집에서 썩히지 말고 버젓한 사장 노릇 한 번 하실라요?"

지금은 문화계의 거물이 된 김용태(민예총 회장)와 문학평론가 염무웅(영남대 교수)이 내게 연락한 것이다. 수영장이나 보트 등의 덮개로 쓰이는 방수포 제조공장인데, 충청도 홍성에 있는 공장을 맡아보면 어떠냐는 제안이었다. 그게 90년대 초반, 환갑에 팔자에 없는 대표이사에 취임한 것이다.

배추 방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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