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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비보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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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토슈즈 없는 맨발. 속이 비치는 헐렁한 드레스. 미국 밤무대 3류 무용수로 가축수송선을 타고 런던으로 건너온 그녀는 희한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중세시대부터 정해진 규칙에 따라 형식미를 강조해온 고전 발레와는 생판 다른 동작이었다. "춤을 출 때 나는 가장 자유롭다." 현대 무용의 효시인 이사도라 덩컨(1878~1927)의 이야기다.

그녀는 틀에 구속된 인간의 몸을 해방시키고, 자신의 내면세계를 춤으로 표현했다. 춤으로 볼셰비키 혁명을 찬양했고, 프랑스를 침공한 독일군 만행을 비난했다. 그리스의 유적 폐허 위, 지중해 백사장에서도 춤을 추었다. 그녀의 춤은 아쉽게 낡은 흑백사진과 가든 파티에서 춤추는 짧은 기록영화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도 '맨발의 이사도라' 신화는 굳건하다. 자식들을 보트 사고로 잃고, 그녀 자신도 스포츠카 뒷바퀴에 스카프가 걸려 목 졸려 숨지는 최후의 비극까지.

미국 뉴욕의 할렘 116번지인 할렘월드. 30년 전부터 뉴욕 뒷골목의 흑인 청소년 춤꾼들이 몰려들었다. 헐렁한 티셔츠와 바닥에 끌릴 듯한 펑퍼짐한 청바지 차림. 몇몇 패거리는 서로 춤 실력을 겨루었다. 엉덩이를 들썩이는 힙합에서, 음악 간주(브레이크)에 맞춰 온몸에 웨이브를 넣거나 격렬하게 휘돌아 감는 브레이크 댄스까지…. 그들은 그들만의 음악에 따라 그들만의 춤을 만들고, 신나게 추었다. 춤의 해방구였다.

요즘 세계 곳곳의 길거리에는 이런 춤을 추는 비보이(B-boy)들로 넘쳐난다. 비보이 문화는 청소년끼리의 새로운 의사소통 수단이 됐다. 비보이 기본정신은 자유다. 음악에서 춤사위.복장까지 딱히 정해진 게 없다. 하고 싶은 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것이 그들의 스타일이다. 현대판 이사도라 덩컨이랄까.

최근에는 국내 비보이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세계 대회를 연거푸 석권하고 홍대거리에는 전용 공연장까지 생겼다. 헤드스핀에, 토마스에, 에어트랙까지…. 중력을 거부하는 화려한 몸짓이 장난이 아니다. 그 현란함과 박진감에 외국 관광객까지 몰려들고 있다. 집에서 내놓았다고 생각했던 아이들이 대박을 터뜨릴 조짐이다.

'맨발의 이사도라' 신화도 이제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 청소년이 몸으로 자신을 당당하게 표현하고, 세계적 평가를 받는 게 싫지는 않다. 그래도 요즘 병원에 청소년 탈골.타박상.디스크 환자가 는다고 한다. 걱정이다. 노파심에서 한마디 한다. "헬멧하고 보호장구 갖추고, 좀 살살 하면 안 되겠니?"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