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양성희의 시시각각] 나와 숫자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99호 34면

양성희 논설위원

양성희 논설위원

난 숫자다, 이렇게 말하면 끔찍하지만 상당 부분 진실이다. 대한민국에서 나를 입증하는 가장 강력한 증표인 주민등록번호를 필두로 평생 나이, 학번, 사번, 점수, 석차, 등급 같은 숫자와 서열에 갇혀 살아간다. 나이는 몇 살이고, 키와 몸무게는 얼마이며, 몇 평짜리 아파트에 식구 몇 명과 살고, 수입은 얼마인가로 내가 규정되는 식이다. 숫자 물신주의에 빠진 현대 사회를 비평하며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하지만 삶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우리들에겐, 숫자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삶과 사회를 규정하는 숫자의 힘 #만약 서로의 숫자를 믿지 못한다면

디지털 시대가 되니 숫자의 위력이 더욱 커졌다. 디지털이라는 것 자체가 모든 정보를 0과 1, 두 숫자로 나누어 전달하는 이진법 세상이다. 디지털 기술 덕에 지금 이 글을 몇 명이 읽는지, 이 글을 좋아하거나 싫어한 사람은 몇 명인지 집계할 수 있게 됐다. 소셜미디어는 영향력(친구 수)이나 호감도(좋아요 수)같은 것도 수치화한다. 전수조사가 가능한 디지털 시대의 숫자 감각은 경이로운 데가 있다. 가령 지금 유튜브에서 가장 많이 본 뮤직비디오는 2017년 1월 12일 올라온 푸에르토리코 가수 루이스 폰시의 라틴 팝 ‘데스파시토’로, 무려 52억 뷰를 돌파했다(2018년 6월 16일). 이게 일 년 반만의 기록이다. 머지않아 유튜브엔 몇천만 뷰 영상쯤은 차고도 넘쳐, 그 정도론 별 감흥을 못 줄지도 모른다.

숫자는 근대 국가의 통치술과도 관련 깊다. 국가는 공식적인 숫자들에 기초해 정책을 입안하고, 사회를 조직하고 관리한다. 18세기 독일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통계(statistics·statistik)’라는 단어의 어원이 ‘국가에 대한 과학(지식)’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기홍 강원대 교수에 따르면 “19세기 말 미국 의회가 센서스(인구조사)를 국가 정체성 형성을 위한 의례로 강조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통계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로서 국민’을 실체적인 것으로 고정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지도가 국가의 모습을 도형적으로 표현했다면, 통계는 그것을 숫자적으로 표현했다.”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인 다수결의 원리도 ‘숫자의 정치’다. 심지어 알랭 바디우는 “근대 의회민주주의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법이 아니라 숫자, 계량가능성, 계산가능성이라고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숫자의 권위는, 그것이 투명하고 객관적 실체라는 믿음에서 나왔다. 그러나 숫자도 종종 거짓말을 한다. 단순 오류나 의도적 왜곡은 물론이고 셀 수 없는 것들을 아예 배제하는 계량화의 한계가 있다. 숫자 자체가 필요와 의도의 산물인데 그런 정치적 맥락을 지워 탈정치화하기도 한다. 『숫자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는가』의 로렌조 피오라몬티는 “통계가 없다면 섣부른 생각과 수사적 논쟁이 정책을 지배할 수 있다”면서도 “통계는 통제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고서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며, 강요하지 않고서 통치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썼다. 유명한 경구도 인용했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거짓말이 있다.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통계.’

통계청장 교체 논란으로 시끄럽다. 경제정책 실패 비판 여론에 정책 수정 대신 통계청장 경질이라는 최악의 수를 뒀다. 정부 스스로 통계의 중립성을 부정한 셈이니, 앞으로 누가 정부 통계를 믿겠냐는 비판이 나온다. 어떤 단순한 통계조차도 소모적인 설전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을 자초한 셈이다. 진영 논리 따라 대표성이 어떠네, 신뢰도와 편차가 어떠네, 맞네 그르네, 지루한 ‘통계 진실 공방’이 한국 정치의 새 레퍼토리로 추가되는 아찔한 생각도 든다. 이래저래 국민만 고달플 뿐이다.

양성희 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