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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명 먹여살린 생산라인, 이젠 고철 신세···다 끝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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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불 꺼지는 산업단지 

지난 8일 충남 천안 백석농공단지 내 한 공장이 수주 물량 감소와 인건비 상승 등으로 가동을 중단하면서 폐허처럼 변해 있다. [신진호 기자]

지난 8일 충남 천안 백석농공단지 내 한 공장이 수주 물량 감소와 인건비 상승 등으로 가동을 중단하면서 폐허처럼 변해 있다. [신진호 기자]

지난 8일 충남 천안 백석농공단지 내에 있는 A업체. 합성섬유를 생산하는 이 회사 내에서 기계소리가 요란했다. 공장 내부에 들어가 보니 포클레인이 생산라인을 뜯어내는 소리였다. 제거된 기계 설비는 마당 한쪽 고철더미에 쌓이고 있었다. 회사 대표 B씨는 “2년 전부터 사업실적이 나빠진 데다 인건비도 크게 올라 공장 합병을 추진했다”며 “매각이 쉽도록 공장 내부시설을 정리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창 땐 직원 40여 명을 먹여살렸던 생산라인을 고철덩어리로 팔아치울 생각을 하니 속이 상해 미칠 지경”이라고 말했다. 이 농공단지에는 A사 외에도 5~6개 업체가 가동을 중단하거나 폐업 수순을 밟고 있다.

단지 곳곳 “매각” “임대” 현수막 #공장 싸게 내놓아도 거래 안 돼 #60대 “차라리 베트남 가서 호프집” #실적 나쁜데 최저임금 크게 올라 #“어렵다”는 옛말, 이젠 “끝났다”

지난 9일 울산시 울주군 반천일반산업단지. 137만㎡ 규모인 이 단지는 75개 업체가 공장부지 분양을 받았지만 58개 제조업체만 들어섰다. 대부분 현대차·현대중공업에 납품하거나 수출용 자동차 부품, 전자장비를 만드는 업체들이다. 오후 3시 한창 바쁠 시간인데도 널찍한 6차로 도로가 한산했다. 드문드문 화물트럭과 외국인 근로자가 보일 뿐이었다. 입주기업협회 관계자는 “현대중공업 수주 가뭄이 계속되면서 최근에도 협력업체 5~6곳이 부도났다. 사장들은 모두 연락조차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 단지 안에서 부동산을 운영하는 한모(55)씨는 “제조업체 사장들이 ‘어렵다’가 아니라 이제는 ‘끝났다’고 한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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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공단의 생산라인이 멈춰서고 있다. 가뜩이나 경기 침체로 휘청대던 기업들은 최저임금 인상과 주 52시간 근무제라는 ‘카운터 펀치’를 맞으면서 더 버틸 힘이 없어졌다.

30일 한국산업단지공단에 따르면 올 5월 말 현재 전국 40여 개 국가산업단지 가동률은 평균 82.6%다. 가동률이 70% 이하인 곳도 10곳이나 된다. 부산과 전남의 경제를 지탱하던 녹산산단과 대불산단의 가동률은 60%를 밑돌고 있다. 전북의 국가식품클러스터의 가동률은 37.5%에 그쳤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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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는 통계청 집계에서도 확인된다. 산업활동동향 자료에 따르면 5월 제조업 평균 가동률은 73.9%에 그쳤다. 1998~2017년 제조업 평균 가동률 수치(76.7%)보다 2.8%포인트 낮다. 이 기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2007년), 리먼 사태(2008년), 유로존 재정위기(2011년) 등 경제에 큰 충격을 줬던 일이 많았던 점을 감안하면 현재 가동률은 매우 초라하다.

그나마 버티는 기업들도 언제 문을 닫을지 모른다. 14일 창원시 성산구 창원공단 내 한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에는 기계 도는 소리가 시끄러웠지만 직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업체 대표 김모(40)씨 부부만 공장에 있었다. 이 회사는 볼트와 너트 등을 생산하는 2~3차 하청업체로 ‘마치코바(まちこうば·시내에 위치한 작은 공장)’라 불리는 업체다. 15년 전 설립돼 한때는 직원이 6명까지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 말부터 올 초까지 직원을 모두 내보냈다. 김 대표는 “200만~250만원이던 월급이 최저임금 인상으로 300만원을 넘어섰다. 한 달 매출 2500만원은 늘지 않는데 월급 주고, 기계 임대료 주고 나면 남는 게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창원공단 전체 4698곳 공장 중 직원이 0명인 곳은 150곳이나 된다.

인천 남동공단 인근 부동산에 나붙은 공장 매물 목록. [김경록 기자]

인천 남동공단 인근 부동산에 나붙은 공장 매물 목록. [김경록 기자]

울산시 북구 효문공단에서 자동차 선바이저(차광판)를 제조하는 길모(62) 사장은 30년 운영해 온 업체를 정리할 계획이라면서 “다시는 제조업을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라며 “차라리 베트남 가서 호프집을 하겠다”고 했다. 그는 “현대중공업 하청업체를 경영하던 친구가 직원 퇴직금을 못 줘 구속됐다”며 “위에서 대기업이 누르고 밑에서 직원들 인건비가 치고 올라오니 중간에 있는 우리는 절망뿐”이라고 말했다.

문을 닫는 공장은 속출하는데 제조업에 뛰어드는 신규 기업은 없다. 국세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폐업한 제조업체는 1만1936곳이다. 2014년 9669곳에 비해 20% 이상 많아졌다. 반면에 신규 창업 수는 올 1~5월 사이 7620개에 그쳤다. 지난해 같은 기간 8229개에 비하면 7.4%나 줄었다.

문을 걸어 잠그고 폐쇄한 업체. [김경록 기자]

문을 걸어 잠그고 폐쇄한 업체. [김경록 기자]

제조업 기피 현상이 심해지면서 공장을 내놔도 잘 팔리지 않는다. 130여 개 업체가 입주한 충남 천안시 백석농공단지에는 단지 곳곳에 ‘공장 용지 매각’ ‘공장 임대’ 등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인천시 남동공단의 한 업체는 해외로 공장을 이전하려고 국내 공장과 부지를 매물로 내놓았지만 2개월째 매수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남동공단 인근 K중개사무소 대표는 “매물이 20여 개 올라와 있는데, 팔러 오는 사람은 있어도 사러 오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시화·반월 공단에도 공장 매물이 100여 건 나와 있다. 울산에서 9년째 공장 매매·임대를 주로 중개한 김신일(59)씨는 “2016년부터 공장 매물이 많이 나오더니 지난해 하반기부터 심해졌다”며 “시세보다 싸게 내놔도 제조업 분위기가 워낙 안 좋으니 거래가 안 된다”고 말했다.

공단 위축은 인근 경기에도 곧장 영향을 미쳤다. 야간잔업이 줄면서 야식문화도 사라졌다. 울주군 반천산단에서 식당을 열고 있는 한경혜(52)씨는 “‘내일은 좀 나아지려나’한 게 벌써 1년이 넘었고, 갈수록 나빠지기만 한다”며 “오후 9~10시까지 잔업을 하는 공장이 예전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되는데 식당인들 잘 될 리가 있냐”고 반문했다.

황진호 울산발전연구원 연구위원은 “제조업은 안정적이면서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기 때문에 산단 가동률 저하는 위기의식을 갖고 봐야 할 문제”라며 “대기업, 중소기업, 노동계를 포함한 지역단체까지 참여하는 대화의 장을 만들어 공단을 되살릴 해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특별취재팀=서울·인천·천안·울산
박태희·박형수·임명수·신진호·최은경 기자
adonis55@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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