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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JERIReport

"수출입 대금, 원화 결제 늘릴 방안 찾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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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예를 들어 우리나라 국민이 동남아.중국.일본 등에 관광을 가 원화로 쇼핑하는 것은 교환의 매개 수단에 해당하고, 국제 간 교역에서 원화로 대금을 주고받는 것은 결제 수단으로 쓰이는 것이다. 증권 투자, 채권 발행, 대출 등 금융거래에서 원화가 대상 통화로 사용되는 것은 가치 저장 수단으로 기능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원화가 대외거래의 결제통화로 사용되면 환위험을 예방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우리나라 기업이 미국 달러화 표시로 신용장을 열어 수입대금을 결제할 경우 원화 환율이 당초 수입계약 때보다 올라가면 오른 만큼 손해를 보지만 원화로 신용장을 개설하면 환율 변동과 상관없이 약정된 원화금액만 결제하게 되므로 환위험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리고 국민이 원화를 대가로 물품을 수입하거나 해외에서 주택을 취득하면 국가경제 입장에서 볼 때 원화(현금)의 제조비용만으로 훨씬 더 큰 자산을 얻게 되는 이른바 화폐주조차익(seigniorage)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원화의 국제화가 진전되면 국내외 금융시장 간 구분이 없어지고, 자금 이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금리와 환율이 급격히 변동될 가능성이 커지고 이에 따라 당국은 정책을 운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며 실물경제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 외국인이 원화를 자유롭게 차입하고 보유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우리나라의 기초 경제여건과 금융시장이 취약할 경우 해외 투기자금들의 공격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외국인의 자국통화표시 거래에 대한 제한이 많지 않았던 태국.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는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를 겪은 뒤 이를 엄격히 규제해오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 달러화 일색이었던 국제 상거래에서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후반이다. 일본과 독일은 앞서 언급한 통화 국제화의 부작용 때문에 그 이전까지는 자국통화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데 소극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 누적에 따른 자본축적과 물가안정으로 국제 신인도가 높아짐에 따라 80년대 초반부터 금융시장을 개방했고 이에 수반되어 자국통화의 국제화도 진전됐다.

일본은 신외환관리법 제정(80년 12월)으로 외환과 자본자유화의 기반을 마련한 뒤 엔-달러위원회(83년 11월)를 통해 자본자유화의 폭을 크게 넓히는 한편 유로엔 등 엔화의 역외거래도 허용했다. 90년대 들어서는 국채시장을 개방(94년 4월)했고 외환과 자본거래에 대한 규제도 철폐(98년 4월)했다.

독일 마르크화는 유럽통화제도(European Monetary System)의 창설(79년 3월) 뒤 외환시장 개입 통화로 사용되면서 국제통화로서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 후 비거주자의 마르크화표시 채권매입(88년 10월), 국내에서의 외화표시 채권발행(90년 1월), 비거주자의 마르크화표시 기업어음(CP) 발행(92년 8월) 등 일련의 자유화 조치가 이루어지면서 마르크화의 국제적인 지위가 향상됐으며 99년 1월부터는 유로화가 그 위상을 이어가게 됐다.

일반적으로 원화가 선진국 통화처럼 통용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환율과 물가 안정을 통해 원화가치가 대내외적으로 견실해짐으로써 국제적인 상거래에서 원화가 결제나 투자 대상 통화로 매력을 끌 정도로 신뢰를 쌓아야 한다. 둘째, 우리 기업이 국제 무역에서 원화를 결제통화로 사용해도 상대방인 외국인이 이를 받아들일 만큼 우리 상품의 경쟁력이 높아야 한다. 셋째, 외국인이 원화 금융상품을 선호하고 국내 금융시장을 통해 금융거래를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기준에 비추어 볼 때 현재 원화는 국제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자격을 어느 정도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그동안 통화당국의 노력으로 원화가치가 안정됨에 따라 동남아와 일부 미주지역에서 교환수단으로 원화가 이용되고 있으며, 우리나라 교역규모가 세계 12위에 달하고 있을 뿐 아니라 반도체.이동통신기기 등 국제경쟁력이 월등한 상품 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다만 국내 금융시장의 상품과 거래기법이 다양하지 못해 주식 외에는 원화 금융상품에 대한 외국인의 선호도가 높지 않으며 우리나라의 금융시장 규모도 크지 않을 뿐 아니라 외부충격에 취약해 외국인의 원화펀딩 등 일부 자본거래에 대해서는 여전히 제한을 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88년 11월 국제통화기금(IMF) 8조국으로 이행하면서부터 지금까지 경제 개방화에 따라 원화의 국제통용과 관련된 규제를 점진적으로 완화해온 결과 원화는 교환의 매개수단으로 국제화가 상당히 진전됐다. 국민은 세관에 신고하는 절차 없이도 1만 달러 상당의 원화를 해외로 가져나가 여행경비로 사용할 수 있으며 외국인은 한도 제한 없이 원화로 환전해 사용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외국환은행이 해외에서 환전용으로 원화를 수출한 규모는 2002년 514억원에 불과했으나 지난해에는 1406억원으로 세 배 가까이로 증가했다.

또한 지난달 3일부터 국내 금융기관 해외점포뿐 아니라 외국 금융기관도 외국인을 상대로 원화 환전을 할 수 있게 했고 이에 필요한 원화의 수출입도 자유화했으므로 앞으로 그 규모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외국인과의 교역에서 원화 사용 비중은 전체의 0.6% 수준이어서 아직 미미하다. 이는 외국인이 원화 사용에 불편을 느끼고 관심이 부족한 데 주로 기인하지만 외환 규제에도 일부 원인이 있다. 즉 내국인과 외국인 간 원화표시 경상거래의 결제는 비거주자 자유원계정을 통하도록 돼 있는데 이는 당사자 간 추심에 의할 경우에 주로 이용할 수 있고 수출입 결제에서 일반적으로 이용되는 환거래 방식은 이를 이용하기가 어렵다. 한편 외국인의 원화 차입은 올 1월 1일부터 허가제에서 사전신고제로 규제를 완화했기 때문에 국내에서 외국인의 원화 금전대차거래는 최근에서야 그 실적이 나타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원화 국제화는 당국이 계획을 세워 추진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물과 금융부문의 대외경쟁력을 높여야만 가능해진다. 또 원화가 해외에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성장잠재력을 확충하고 경제의 안정을 기해야 하며, 외국인이 원화 금융자산을 투자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원화의 대외가치 안정뿐 아니라 동북아 금융허브를 견실히 구축해 국내 금융시장의 선진화를 이룩해야 한다.

아울러 금융시장에 미치는 교란 요인을 최소화하면서 국제거래에서 원화가 결제통화로서 편리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외국 금융기관의 원화환거래를 허용하고 외국인의 원화 금융거래와 현물환거래를 자유화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한편 원화의 금액 단위가 너무 커 외국인이 사용하는 데 불편이 있으므로 화폐단위의 변경을 추진하는 것이 원화 국제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광주 한국은행 국제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