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대통령 전용열차 '경복호' DJ싣고 북녘 땅 달릴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대통령 전용열차 '경복호'는 마침내 북녘 들판을 달릴 것인가.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6월 방북길에 경의선 열차를 탈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열차 방북이 실현된다면 철도공사 차량기지창에 보관된 경복호는 DJ를 싣게 된다.

DJ는 지난해 겨울 방북 의사를 처음 밝혔을 때부터 '열차 방북'을 희망해왔다. 한나라당이 '5.31 지방선거를 겨냥한 북풍(北風)의혹'을 제기해 방북 시기가 5월에서 6월로 미뤄졌지만 DJ의 열차 방북 의지는 강렬하다.

DJ로선 2000년 6월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이후 6년 만에 남북 철도를 재개통시켜 명실상부한 남북 교류.협력 시대의 물꼬를 틀 기회를 맞고 있다. 더욱이 개성공단에 입주한 우리 업체들은 최근 "개성~부산을 철도로 연결해 수출 상품의 물류 비용을 낮춰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철도공사는 DJ 방북을 계기로 경의선 재개통 사업을 밀어붙인다는 구상이다.

그런 점에서 DJ의 열차 방북은 정치적.경제적 대사건이 아닐 수 없다. 1951년 6월 경의선 서울~개성 구간(75㎞)이 막힌 이후 55년 만에 한반도의 대동맥이 다시 뚫리는 것이다. DJ가 한 시간만 타면 되는 항공기를 거부한 채 한사코 열차를 타겠다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경의선 재개통을 위한 남북 당국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남북 당국은 11일부터 이틀간 개성에서 경의선 열차 시험운행과 철도 개통식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제12차 남북 철도.도로 연결 실무접촉을 갖는다.

DJ 비서 출신의 장성민 전 민주당 의원은 최근 "DJ의 열차 방북시 대통령 전용열차인 '경복호'를 탈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서주석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수석은 8일 "정부에서는 김 전 대통령의 개인 자격 방북을 최대한 존중하되, 전직 대통령이기 때문에 이를 적극 지원해 나간다는 일관된 입장"이라고 밝혔다. DJ의 방북 길에 경복호를 제공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얘기다.

경복호는 2002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해 도라산역을 방문했을 때 운행된 적이 있었다. 승객수에 따라 6량에서 12량까지 편성이 가능하다. 방탄 장치에다 각종 편의시설 등을 갖춰 일반 열차보다 30%가량 더 무거운 것으로 전해진다.

이와 관련, 철도공사 관계자는 "경복호를 10량으로 짜면 각종 장비와 함께 300명을 태울 수 있다"고 말했다. 웬만한 대형 여객기의 수송 능력과 비슷하다.

그러나 DJ의 열차 방북에는 여전히 난관이 남아있다.

우선 북측의 우려와 반발이다. 북한 군부 내 강경파들은 "철도를 개통하면 주요 군 시설이 드러나는 것은 물론 철도 주변의 낙후된 주민 생활상이 노출된다"며 반발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철로.교량.터널 등이 낡아 감속 운행을 해야 한다는 점도 북측에는 부담이다.

특히 도라산~개성 구간은 철도 시설이 너무 낡아 기차 속력을 30~40㎞로 낮춰야 하는 구간이 적지 않다. 일반 열차보다 무거운 특별열차인 만큼 안전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철도공사 측은 "정상 속도라면 도라산~평양(직선거리 200㎞) 구간은 2시간쯤 걸리나 특별열차 운행에는 4~5시간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내심 DJ의 열차 방북을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다. DJ의 2000년 평양 방문에 대한 '서울 답방'의 압력이 더욱 높아질 것을 의식해서다. 그는 1994년 김일성 주석 사후 권력을 승계한 뒤 중국.러시아를 방문할 때마다 항공 편을 거부하고 한사코 열차 편을 고집해왔다. DJ가 철도 편으로 방북하면 거꾸로 김 위원장 역시 열차 편으로 서울에 올 수 있음을 국내외에 과시하는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DJ 자신의 건강도 열차 방북 성사 여부를 결정할 변수다. 그는 지난해 8월 폐렴 증세로 입원하기 전부터 신장 투석 치료를 받아왔다. 의료진들은 국내외 인사의 면담 일정을 최대한 줄이고 휴식과 요양에 치중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특히 이희호 여사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라고 한다. 의료진들은 "건강을 생각하면 열차 편보다 항공 편이 더 낫다"고 충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열차 방북 시에는 남측 의료진과 각종 의료 장비.기기, 산소호흡기, 신장 투석 장비 등을 싣고 가야 할 판이다.

남측 보수 강경세력의 반발 역시 부담이다. 이들이 열차 운행을 막으려 경의선 철도 위에서 극렬 시위를 벌인다면 남측의 국론 분열상을 만천하에 드러낼 수도 있다.

DJ는 지난 8일 동교동 자택에서 세계적인 시사만화가 라난 루리를 만났다. 루리는 이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의 방북 열차에 전세계를 하나의 띠로 묶겠다는 뜻을 담은 '유나이팅 페인팅(Uniting Painting)'을 그리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루리의 꿈은 부산에서 출발해 독일 베를린까지 잇는 아시아.유라시아 대륙 횡단 철도 차량에 자신의 그림을 그리겠다는 것이다. DJ가 오랫동안 구상해왔던 한반도 평화.통일의 꿈과 맥이 닿아있다.

DJ는 80 평생 독립과 통일에 매진했던 김구 선생을 사표(師表)로 삼아왔다. 대통령 전용열차 '경복호'가 DJ의 꿈을 싣고 초여름의 북한 들판을 달릴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양수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