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벌거벗어야할 사람들|노계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요즈음 우리는 바로 얼마전까지 권력과 금력의 화신같던 「거물」들이 벌거숭이가 돼 가면서 허물어져 주저앉는 모습들을 보고있다. 나는새도 떨어뜨릴만큼 공포와 경원의 대상이었던 사람들, 황금과 세도를 떡주무르듯 휘둘러대던 사람들의 그위선과 가식으로 뒤덮인 의상들이 하나하나 벗겨져나가는 꼴을 보고있다.
그리고 그 위풍당당한 의복들이 벗겨질때마다 그 속에 숨겨진 것이 불법과 부정, 허위와 기만의 종창으로 가득찬 만신창이 알몸이었음을 발견하고 탄식과 통분을 금치 못한다. 그 알몸의 종창에서 뿜어나오는 악취로 하여 차마 숨을 쉴수 없을 만큼 구역질과 현기증을 느끼기도 한다.
입만 벙긋하면 국가와 민족, 정의와 법을 염물처렴 되뇌었던 자들이 자신의 영화와 사리를 탐하는데는 불의와 불법을 식은죽 먹듯 저지른 알몸의 실체를 보면서 전률을 금치 못한다.
막강한 권력자의 친족·인척임을 기화로 그 후광을 악용하여 남의재산을 송두리째 빼앗거나 갖가지 이권에 끼어들어 이득을 챙기는가하면 공금횡령에서 탈세까지 서슴지 않았던 자들은 쇠고탕을 찬채 발가벗겨지고 있다.
그럴듯한 명분으로 위장된 권력자의 영구집권 근거지 마련을 위해 기업으로부터 거액의 기금을 강제로 긁아모았던 권력의 하수인들도 은페와 날조의 베일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알몸을 드러내야할 자들이 이들뿐이 아니란 사실을 우리 모두는 안다. 「광주 민주화운동」을 잔혹하게 탄압했던 주역들도 그 진실을 밝혀야 한다. 그 참극이 어떻게 해서 촉발됐으며 어떻게 해서 확대되고 또 극한 상황으로 심화됐는가, 그 진실이 드러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때의 주역들이 모든 진실을 거짓없이 털어내놓아야 한다.
당시 그들의 행동이 그런 상황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판단한다면 발포와 진압의 책임자는 왜 떳떳이 나서서 정체를 밝히지 못한단 말인가.
당당히 나서서 상황의 불가피성이라도 주장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자신의 행동이 떳떳치 못하고 판단이 잘못됐었음을 자인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언론통폐합의 주역들도 「소신」이라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노렸던 바 그 진짜 의도를 실토해야 한다.
이른바 언론인 출신이라는 자들이 자기들이 종사했고 또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출세했던 언론을 권력을 행사하게 됐다해서 그들의 사회적 진출의 모태인 바로 그 언론을 난도질한 그 패덕과 반역의 폭거도 용서받을수 없다. 통페합에 이어 나타난 언론탄압이 이른바 제5공화국의 기반조성과 권력유지, 그리고 요즈음 그 실상이 밝혀지기 시작한 5공비리의 방호벽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폭거의 주역들도 그 적나라한 알몸을 드러내야 한다.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한 일, 또 앞으로 실체가 드러나게 돼있는 일, 아니면 일시적으로는 숨겨져 버릴지도 모를 모든 불법과 부정과 비리는 제5공화국을 「통치」했던 최고권력자에게 최종적인 책임이 돌아감은 불가피하고 명백한 일이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권력의 핵심과 그의 친·인척들의 알몸이 만신창이가 된 몰골로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는데 그 최고책임자는 무얼하고 있는가. 스스로 국민앞에 나서야 한다.
그는 그의 마음에 들지않는 수습방안이 아니면 「독자노선」을 걷겠다는 태도라고 한다. 이것은 그와 함께 지금까지 동반자의 길을 걸어왔던 자들에 대한 엄포 내지는 협박으로도 들린다. 잘못된 생각이다.
지금은 누구와 협상이나 흥정을 할 단계가 아니다. 국민에게 모든 것을 숨김없이 털어놓고 사죄하며 용서를 빌 때다. 그가 상대해야할 사람은 지금은 등을 돌리고 돌아서버린 옛 동지가 아니라 그의 단죄와 처벌을 요구하고 있는 국민인 것이다. 그들앞에 결연히 나서서 국민들이 품고 있는 의혹과 불신에 대해 사실대로 해명하고 잘못이 있으면 사죄하고 용서를 빌어야만 한다. 한톨이라도 의혹의 찌꺼기를 남겨서는 안된다.
만약 털끝만한 불신의 앙금이라드 남긴다면 그것은 호된 질책의 일시적인 모면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말것이다.
영원히 역사의 심판대에 서기보다는 스스로 한 시대의 심판으로 마무리 짓도록 노력하는 편이 더 낫다.
벌거벗어야할 사람들은 벌거벗음으로써 자기의 정신적인 평안과 나아가서 인간적인 구원도 얻을 수있을 것이다. 벌거벗어야 그 알몸을 덮고 있는 종창을 진단도 하고 치유도 할수 있지 않겠는가.
지금 우리국민은 막연한 불안과 초조감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는 언제까지 돌멩이와 최루탄이 난무하는 거리에서 불안과 공포, 증오와 불신, 의혹과 반목의 늪속에서 허위적거리며 살아야 하는가. 이 음산하고 숨막히는 늪에서 하루속히 탈출하여 새로운 도약을 도모해야한다. 이 도약을 위해 과거의 권력자들이 해야할 마지막 기여는 그들이 미련과 탐욕의 옷을 과감히 벗는 일이다.
때마침 수목에 입혀졌던 자연의 낡은 옷이 벗겨져 땅에 떨어지는 계절이다. 수목은 낙엽을 떨구어버리고 앙상한 가지만 남는다. 썩고 병든 낙엽을 털어버려야만 새봄에 화사한 신록의 옷을 다시 입을수 있기 때문이다. 낙엽은 그 신록을 위한 자양이 되기위해 땅에 돌아가는 것이 낙엽의 마지막 본분을 다하는 길이 아니던가. <편집국장대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