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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씨 문제는 흥정거리가 아니다|더 실기 말고 최후의 결단을 해야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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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2면

최근 전씨 일가 문제의 처리가 초읽기에 들어간 듯한 분위기 속에 정부·여당과 전씨의 연희동 측간에는 연일 처리방안을 둘러싼 협의를 벌인다는데 도대체 무슨 얘기를 갖고 이렇게 꾸물대고 있는지 답답한 노릇이다.
상황은 각 일각 긴박해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국민감정은 격앙되고 있는 터에 무슨 조건을 따지고 헌납재산의 액수를 놓고 이견을 조정 중이라는 얘기는 차마 듣기가 거북하다.
처리 방안의 골격으로 제시되고있는 해명→사과→헌납→낙향의 원칙이 결정됐으면 더 늦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실행이 있을 뿐이지 여기에 조건이나 협상이 개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자기 형제들과 종형제, 처남, 동서 등 주변 인물들이 하나 예외 없이 모조리 저지른 오탁의 사례들이 연일 터지고 있는데 해명·사과에 무슨 조건이 붙을 수 있는가.
재산 헌납 문제도 그렇다. 일해재단 문제 하나만 보더라도 전 전 대통령 본인을 중심으로 엄청난 돈이 자의적으로 조달, 처분된 것이 명백한데 이런 과정에서 이루어진 축재가 국민에 환원되는데 액수의 조정이 왜 필요한가. 액수가 얼마가 되든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밝히고 국민에게 되돌려 주면 그 뿐이다.
그것을 마치 협상 대상이라도 되는 듯이 「조정」이라는 말이 들리는 자체가 불쾌한 일이다. 동산이든, 부동산이든 자기가 가져서는 안 될 재산이 얼마인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알 것이다. 이제나마 뉘우치고 성심을 다해 현재의 자기입장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반성조치를 하는 것이 남은 마지막 선택일 뿐이다. 그리고 누가 말하지 않더라도 주변의 친·인척재산도 그것이 특혜와 권력의 그늘에서 이뤄진 것인 이상 개인소유로 유지할 생각은 버려야할 것이다.
그리고 정부·여당도 이 문제를 두고 더 이상 시간이 없음을 알아야한다. 모든 문제를 전씨 일가의 결심에 맡기고 여권은 발뺌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오판일 것이다. 연내에 5공 청산작업을 매듭짓기로 한 이상 연희동 측과 「협상」이나 「조정」만 할 게 아니라 나름대로 처리방안을 밝히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 그 과정에서 노 대통령이나 민정당 측은 어차피 여론의 비난을 감수할 각오를 해야할 것이다.
5공이 전씨 일가만의 5공이 아니었고 지금의 6공 세력도 5공의 중요한 일부였던 만큼 청산되고 비판받아야 할 요소는 여권 내부에도 많다. 이 점을 인정하는 한 정부·여당은 정치적 손실을 각오하면서도 처리기준을 내야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부·여당이 노 대통령과 전 전 대통령과의 면담을 회피하는 듯이 보인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노 대통령이 필요하면 전씨를 만나고 직접 이 문제에 관해 결단을 내려야 한다. 가령 기존의 방침대로 야당이나 일부 여론의 비난이 있더라도 이 문제의 정치적 처리를 밀고 나간다면 노 대통령이 전씨를 만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해명에서 낙향까지 이어지는 처리방안도 그저 비공식적인 논의 단계에 둘 것이 아니라 공식적인 정부·여당의 방침임을 노 대통령이 명백히 천명하고 그에 따른 책임도 져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시간이 없다. 어느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전씨의 사법적 처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뜻밖에 높았다. 이 경향이 줄어들 가능성이 적다는 사실을 정부·여당 측은 직시해야 한다. 학생들의 화염병은 날로 치열해지고 국민 감정은 거칠어져 가고 있다. 더 이상 끌면 정치권이 무력해지는 상황이 올는지도 모른다.
국민 여론이나 시위로 직접 문제를 해결하려는 충동이 계속 치솟고 있음을 알아야할 것이다. 빨리 국민이 납득할 수준의 처리 전망이라도 내놓아야 이런 충동은 그나마 진정될 수 있다.
이제 전순환씨 구속에 이어 전기환·전우환씨도 구속되었다. 곧이어 처남·동창들에게도 사법의 손은 미칠 것이 틀림없다. 그 다음 순서로 국민은 누구를 지목할 것인가. 그런 상황이 되면 정부·여당이 비록 정치적 처리를 하고 싶더라도 할 힘이 없어질 것이다.
따라서 노 대통령으로서는 귀국 즉시 이 문제에 관한 처리방안을 명확한 어조로 밝혀야 한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야당 총재들과도 직접 만나 문제처리의 의견교환을 하는 것도 검토함직 하다.
여권은 이 문제를 그 동안 질질 끌어오는 바람에 사태가 더욱 악화됐음을 이제는 알았을 것이다. 늦었지만 이 중요한 고비에서 결단을 내리는데 또 다시 실기하거나 우유부단한 자세를 보이지 않기를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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