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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대사대불은 백제 사람들 작품|동국대 조사단 근기 지방 학술 기행-김사엽 <동국대 일본 연구 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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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기원 4, 5세기께 한반도로부터 농경 및 생산의 기술과 말을 가지고 일본 근기 남부에 이주해 온 이른바 제2차 도래집단이 오사카 서남해안지대에 정착, 이 일대를 개척해 부를 축적하니 많은 호족들이 탄생하였다.
6, 7세기께에는 제3차 도래집단으로 고급 기술자·지식인 등 문화인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은 아스카 (비조) 지방을 중심으로 정착해서 그 일대를 개척해 나가는 사이 이들 두 집단은 서로 결합하여 그 가운데서 야마토 (대화) 조정이 형성되었는데 중심 세력은 백제계였고, 그중에 주도권을 쥐고 이끌어나가던 씨족은 백제계의였다. 이씨 족은 소아만지의 7대 손인 「이루카」 (입록)에 이르러 반대파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야마토 조정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백마강에 구원병>
그때까지 큰집이라 할 수 있는 한반도의 백제에 의지해 왔으나 이제는 자주적인 국가 경영의 노선을 모색해야만 했다. 이 사이 야마토 조정의 동태를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이렇다. 소아만지의 7대 손인 「이루카」가 645년 아스카에 있는 이타부키 (판개)궁에서 반대파의 거물인 중대형황자 (뒤의 천지천황)와 그의 분신인 중신겸족에 의해 살해되니 이에 소아씨종가는 토멸 되고, 그 뒤를 신라계의 호족인 식장씨 (대왕의 외척)가 맡는다. 그러나 대왕가는 여전히 가라=백제계였다. 그러다가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침공의 위협에 직면하자 긴박해진 야마토 조정은 극도의 긴장감과 불안에 싸인다. 그러던 중 660년10월에 백제로부터 사자인 귀실복신이 야마토 조정에 왔다. 12월에는 드디어 백제 구원병을 편성하고 661년 정월에 69세의 제명여제가 몸소 군선에 올라 수군을 이끌고 축자 (지금의 구주복강)를 향해 남바 (난파, 지금의 대판)를 떠났다. 축자에 도착한 석달 뒤에 여제는 현지에 있던 조창궁에서 병사한다.
원정군을 따라온 중대형황자는 군대를 백제로 떠나 보내고 나서 아스카로 되돌아갔다. 662년8월, 일본 수군은 백촌강 (부여 백마강 하류)에서 여지없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 패전의 고배를 맛본 천지는 그로부터 4년 뒤인 667년에 오호미 (근강, 지금의 자하현)에 있는 가라사키 (신기)라는 궁벽한 곳으로 천도한다. 신라가 쳐들어올지도 모를 위험에 대비코자한 처사였다.

<신라와 화친 모색>
678년에 고구려마저 망하고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하자 일본은 지금까지 파견해오던 견당사를 669년 파견을 최후로 중지하고, 대신 견신라사를 부활시켰다. 이때 국호도 왜를 고쳐 일본으로 하여 면목의 쇄신을 꾀하려 하였다.
백제 큰집을 구원코자 했던 일본으로서는 굴욕적인 처사였지만 그러나 일본을 공격해 올 가능성은 당나라보다 신라가 큰 것이었으므로 정치적으로는 부득이한 처사라 할 수 있고, 재정적으로 보더라도 한반도와의 무역을 전면적으로 잃는 것은 일본으로서는 파멸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두가지 이유로 견당사의 중지와 견신라사의 부활은 불가피한 사정이었다.
671년 천지왕이 근강의 궁정에서 세상을 떠나자 대화에 있던 백제계의 세력들은 대해인황자 (뒤의 천무천황)를 떠받들고 나와 근강의 천지 아들인 대우황자 (홍인 천황)에게 반기를 들었다. 한반도 무역의 독점권을 근강으로부터 다시 야마토로 되돌리려는 속셈에서 이세 미농 과야 등지에 있던 백제계 세력의 도움을 얻어 마침내 승리를 거둔다. 이것이 임진신의 난이란 것이다.
이 결과 대해인황자가 왕좌에 오르게 되니 곧 천무천황이다. 도읍은 다시 대화평야로 돌아왔고, 왕조와 그 배경은 모두 백제계가 되었으며, 한반도 무역의 독점권은 대화의 「아야」씨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되었다.
백제가 망한 전후에 많은 난민이 일본으로 건너왔다. 그중에는 왕손이며 귀족·고관들도 끼어 있었다. 이들 이주민은 일본 각처에 정착해서 새 생활을 개척했으며, 그들 후손도 더욱 번창했으니 오늘날 일본 민족 구성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필자는 그들의 유적지를 탐색하려고 우선 오사카 (대판)에 거주하는 재일 사학자인 단희린씨를 한국인 회관에서 만났다. 그는 대판 일대를 중심으로 한 도래인의 발자취를 더듬어 이에 관한 저작을 폈고, 지금도 이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많은 조언을 받아 그 뒤 실제로 조사에 임해보니 단씨가 각처를 탐색하던 10년 전에 비해 시골의 교통과 도로 사정이 많이 좋아져서 매우 편리했다.
필자는 대표가 됨직한 백제왕손 한사람의 유적지를 조사코자 경판전차를 대판정옥교에서 타고히라가타역에 내려, 거기서 다시 기사이치 (사시)선을 갈아타고 첫째역 미야노사카에 도착했다. 동쪽을 향해 약 15분쯤 걸어가니 백제왕 신사가 있고 그 옆의 백제사가 세워졌던 터는 공원이 돼 있었다. 신사의 제신은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의 둘째아들 선광이다. 절은 그들 일족의 명복을 빌기 위한 씨족의 사찰이다.

<성을 백제왕으로>
631년 (무왕 32년)에 무왕은 세자의 아들인 풍장과 선광 형제를 일본 조정에 보내어 두 나라 우호를 다짐했다. 그 뒤 660년에 백제가 나·당 연합군의 침공을 받아 멸망 직전에 처해 있을 때, 백제는 좌평 (대신)인 복신을 일본에 보내어 구원을 청했다. 복신은 원조를 얻어 풍장과 함께 본국에 돌아와 두 사람은 조국 부흥 운동을 꾀하다가 서로 불화하여 좌절되고 풍장은 고구려로 달아나니 이에 백제는 완전히 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앞서 풍장과 함께 일본에 와있던 선광은 조국의 멸망을 통탄하면서 귀국하지 않고 그냥 머물러 남바에 정주했다. 그 뒤 지통여제 때 「백제왕」 (구타라고니기시)이라는 성씨를 받았다. 『삼국사기』에는 풍장을 부여풍이라 기록했고 선광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백제 신사의 배전 처마 밑에 「백제국왕, 우수대왕」이라 새겨진 편액이 있다.
신사 동쪽에 백제사 터가 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문이 게시돼 있다. 『70여개의 초석이 토단 위에 남아 있다. 남대문·대웅전·강당 등의 터가 일직선상에 위치해 있고, 중문과 대웅전 사이에 2기의 탑이 동서로 마주보며 회낭은 그 주위를 돌아 있다. 땅속에서 많은 기와·고전·식불구의 쇠붙이 등이 나왔다. 이 절은 나량후기 (8세기말께)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며, 역대 왕이 20여회나 이곳에 납시었다.』
선광이 지통여제로부터 백제왕이란 성씨를 받은 뒤 이 일족은 야마토 조정에 나아가 군사·외교·문화면에 크게 활약했는데 단씨의 통계에 의하면 선광에서 44대 후손에 이르는 사이의 저명한 인물로 상부 (정부의 최고 기관)에 오른 고관으로부터 29지방장관에 이르기까지 1백85명이 넘는다고 하였다.
그러한 중에 무엇보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사실은 앞서 야마토 조정의 대왕 혈통에 백제 출신인 소아씨의 혈맥이 혼합되었던 사실을 보아 왔거니와 이 백제왕의 후손의 경우도 그 자녀 중에 천황의 중궁과 후궁이 된 사람이 있으니, 또한 일본 천황가의 혈통에 백제왕의 혈맥이 섞였음을 알 수 있다.
즉 환무 (두 후궁, 5대 무경의 딸 교인. 7대 교덕의 딸 정향) 차아 (7대 교준의 딸 경명) 인명 (8대 풍준의 딸, 이름은 불명) 등의 천황이 그렇다.

<황금 9백량 헌납>
특히 환무천황은 생모인 「니가사히메」 (신립희)가 백제의 성명왕의 후예인 화씨에서 나왔다 하여 이 대왕은 백제왕씨를 외척으로 삼은 연분으로 재위 20년 사이에 10여 차례나 백제사를 참배하면서 많은 금품을 절에 시주하였다.
백제왕씨 후손 중에 선광의 증손인 경복이란 인물은 일본 역사에 특기되는 존재다. 그는 나라 (나량) 시대인 천평 15년 (743)에 무쓰국 (육오국, 일분 열도 최북단 지역)의 지방장관 (국사)이 되어 임지에 있었는데 이 당시 성무천황이 나량에 동대사란 절과 거기에 안치할 곤려차나대불을 조립하고자 발원하였다.
특히 대불은 일본에 와 있던 백제의 불사 (불상을 만드는 기술자)인 국중공마려 (국골부의 아들)가 만들기로 하였는데, 이 불상에 도금할 황금이 부족했다. 그래서 왕은 전국에 황금을 헌납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경복은 자기 관할지인 소전군에서 캐낸 황금 9백량을 헌납하였다. 그러자 왕은 너무 기뻐서 감동한 나머지 당시 천평이란 연호를 천평감보라 개원하고, 경복에게는 칠위에서 종삼위로 승격시켰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일본인이 크게 자랑하고 있는 동대사대불은 실로 백제인의 기술과 겅성에서 이룩된 것이다.
783년 선광의 8대손인 풍준에 이르러 백제왕씨의 본택 근처에 환무천황이 별궁을 짓게 하고 아울러 백제왕씨의 조신을 그 근방에 모시게 했다.
또 이때 풍준의 집 뜰에 세그루 소나무가 서있었는데 이를 따서 백제왕이란 성씨를 미마쓰 (삼송)라 고쳐 부르게되니 이것이 오늘까지 이어와 널리 알려졌거니와 옛 성씨는 거기에 감추어져 일반은 잘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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