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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스는 떠나도 비리는 여전하다|필리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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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필리핀의 「아키노」정부는 출범 3년이 다 돼 가는 지금도 여전히 부패·비리 등 「마르코스」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그 해결에 부심하고 있다.
86년 2월 민중혁명을 통해 새 정부가 들어선 후 풀어야할 최대과제는 「마르코스」독재하의 부정·부패를 일소하는 것이었다.
「마르코스」전대통령의 절대권력에 결탁해 온갖 이권을 독점했던 2백70여개의 족벌기업들을 처리하는 문제가 시급했다.
이와 함께 「마르코스」부부가 해외에 빼돌린 1백억 달러, 측근들이 그의 권세를 빌미로 해외에서 끌어다 쓴 70억∼80억 달러의 빚더미도 「아키노」정부가 해결해야할 난제로 등장했다. 「아키노」정부는 「마르코스」족벌 경제의 해체 및 부정·부패 척결을 위해 대통령 직속 선정위원회(PCGG)를 조직, 해결에 나섰다.
이 위원회는 「마르코스」의 사유물 화된 2백70여개의 국영기업 중 경영이 부실한 기업을 매각 혹은 통폐합시켜 46개만 그대로 남기는 민영화방안을 추진했다.
그러나 문제해결을 맡은 선정위 자체의 비리는 「아키노」정부를 곤경에 빠뜨리기 시작했다.
조사과정에서 일부 부실기업을 정리대상에서 제외시켜주는가 하면 심사대상인 부동산·빌딩d·고가 예술품 등을 빼돌리는 부정행위로 이 위원회는 「도둑의 소굴」「썩은 달걀」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2년이 훨씬 지난 지금이 위원회는 단 한 건의 비리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으며 실무진의 잇단 파면으로 유명무실한 기구로 전락해버렸다.
그런가하면 「아키노」개혁초기 재산을 몰수당했던 일부 기업인들이 최근 경영권을 되찾고 심지어 군의 비호까지 받고 있어 필리핀 언론에는 「돌아온 사업가」라는 용어가 새로 등장했다.
또한 「마르코스」족벌들로부터 환수한 재산도 다시 구 재벌들의 손으로 속속 넘어가기 시작했는데 필리핀 최대기업인 산 미구엘 식품 등이 그 예다.
게다가 「아키노」는 고위공직자 인선에서도 구시대와의 관계를 단절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부패한 「마르코스」정부의 핵심 인물이었던 「호세·페르난데스」중앙은행 총재와 「페자르·갈라미아」개발은행 총재, 「마르코스」하수인이었으나 출국 금지자 명단에서 제외시켜 의혹을 샀던 「로베르토·옹핀」무역장관의 실제인 「하이메·옹핀」의 재무장관 임명 등이 그러한 예다. 「아키노」가 부정·부패 척결 못지 않게 중점을 둔 것은 토지개혁이었다.
대지주 소유 농토 9백70만ha를 1천2백만 영세농민들에게 분배하겠다던 이 계획은 자금문제와 대지주가 대부분을 차지한 의회의 반대에 부닥쳐 유야무야한 상태로 주요지지기반이었던 농민들의 원성을 사기 시작했다.
오히려 토지개혁 촉구 농민에게 정부군이 발포함으로써 19명을 죽여 악화된 이 문제는 생활의 궁핍으로 인해 공산게릴라로 전향하는 농민들을 막아 공산세력을 저지하겠다는 계획에도 차질을 가져왔다.
필리핀은 아직도 GNP의 50%가 지하경제에 의해 형성되며 부채상환액이 외화수입의 70%를 차지하고 국민의 70%가 빈곤층에 속하는 열악한 경제상황에 놓여 있다.
이러한 갖가지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것은 군부 등 구세력과의 갈등이다.
민중혁명 때 반 「마르코스」로 돌아선 「엔릴레」국방장관과 「라모스」육군 중장의 도움으로 「민주화의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지만 이를 계기로 군이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길을 터 주었다.
「민중항쟁」에 기여한 일부 군부세력들은 현정부로부터 응분의 보상을 기대하고 있어 군의 압력은 「아키노」정부에 딜레마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잦은 쿠데타 도발과 좌익게릴라와의 내전에 시달리면서 군부의 도움이 절대 필요했던 「아키노」로서는 이제 군부배제보다 군부기득권인정으로 그들의 충성심을 확보하는데 오히려 급급한 인상을 주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자연히 집권 즉시 군부의 권력남용을 적발하기 위해 조직됐던 인권위원회의 역할도 흐지부지된 상태라는 것이다.
지난 2년여 동안 발발한 5차례의 쿠데타 중 4차례는 「마르코스」를 재 옹립하려는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행해져 「아키노」정부에 상존 하는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아키노」진영 내부의 불화는 이 정부의 순조로운 진행에 큰 장애가 되고있다.
「마르코스」를 타도하기 위해 러닝 메이트로 함께 뛰었던 「라우렐」부통령과의 충돌이 그 대표적인 예다.
「아키노」의 무능력을 이유로 사임을 종용하는 그는 민중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했으나 나중에 「아키노」 정부 전복 쿠데타 관련혐의로 해고된 「엔릴렌」전 국방장관과 손잡고 「아키노」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
「아키노」정부는 87년에 있은 신 헌법 국민투표 및 국회의원 선거에서 압도적인 국민지지로 민주정부의 외형적 골격은 확보했다.
그러나 신 정부수립 3년이 돼 가는 지금도 민주화의 실질적 발전이 지지부진한 필리핀의 경우 독재의 그늘에서 출발하는 민주화의 장정이 얼마나 험난한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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