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현장기획]“10년 모은 1억 날린다” … ‘권리금 금지’ 쇼크에 빠진 지하도상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30일 오후 점포 60여 개가 모여 있는 서울 중구 을지로입구 지하도상가. 33년째 사무기기 판매·대여점을 운영하는 성모(65)씨는 최근 딴 자격증 하나를 꺼내 보여줬다. ‘화물운송 종사자 자격증’이었다. 그는 “점포 임차권을 팔고 받을 권리금으로 화물차를 산 후 운전기사로 새 인생을 시작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이 점포에선 요즘 한 달에 월 임차료(100만원)도 벌지 못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분노·체념·부정 … 상인들 반응 다양 #서울시, “공유 재산, 매매 대상 안돼” # “권리금 대체 경제적 이득 보장해야”

성씨는 1985년 약 4000만원의 권리금을 내고 이 점포(23.79㎡·7평)에 들어왔다고 한다. 당시 부촌(富村)의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그는 “당시 이 일대에 기업·관공서들이 몰려있어서 사무기기들이 불티나게 팔려 월 순수익이 400만원 정도 됐다”고 말했다. 현재 권리금은 당시의 두배 수준이지만, 그는 이 권리금을 한 푼도 건지지 못하게 됐다.

점포 60여 개가 모인 서울 을지로입구 지하도상가. '권리금 금지' 소식이 알려진 후 상인들은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임선영 기자

점포 60여 개가 모인 서울 을지로입구 지하도상가. '권리금 금지' 소식이 알려진 후 상인들은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임선영 기자

서울시는 지난 19일부터 서울의 지하상가 25곳의 점포 2700여 개에 임차권 양수·양도를 전면 금지했다. 임차인이 내고 들어온 권리금을 회수할 길이 막힌다는 의미다. 권리금은 임차인이 점포 등에 들인 시설 개선비용, 장사가 잘돼서 수익이 보장되는 대가(代價) 등이 포함된 돈을 말한다.

서울시는 “공유재산인 지하상가는 매매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앞으로 빈 점포는 경쟁 입찰에 부친다. 성씨는 “아파트를 샀으면 몇 배가 됐을 돈을 내고 장사를 시작한 것”이라면서 “억울한 마음에 이대로 장사를 접을 수도 없어 막막하다”고 말했다.

‘권리금 금지’를 맞닥뜨린 서울 지하상가들은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이모(52)씨는 지난해 권리금 1억원을 주고 을지로입구 지하상가에 꽃 가게를 차렸다. 1억원은 그가 인근 상가 건물에서 꽃 가게를 운영하며 10년간 모은 돈이었다. 그는 “권리금은 성실히 점포를 잘 일군 것에 대한 보상과도 같은 것이다. 장사 잘되는 점포가 높은 값을 받는 시장의 논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경쟁 입찰을 하면 오히려 수억 원의 입찰가를 감당할 수 있는 일부 사람들만 들어오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점포를 공개 입찰하는 서울 지하철상가(1~8호선 1905개)의 경우 공실률은 10.2%에 이른다. 5년 기준 최대 입찰가가 약 15억9000만원인 강남역 상가의 공실률은 14.3%다. 점포 7개 중 1개가 빈 점포다.

전국지하도상가 상인연합회 소속 회원들이 지난 6월 28일 서울시의 권리금 금지 조례 개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전국지하도상가 상인연합회 소속 회원들이 지난 6월 28일 서울시의 권리금 금지 조례 개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상인들은 전국 상인연합회를 중심으로 지난 1년 여간 “권리금 금지는 재산권 침해”라고 반발해왔다. 하지만 결국 ‘지하도상가 임차권 양수·양도를 금지한다’는 내용이 들어간 ‘서울특별시 지하도상가 관리 조례 일부개정 조례’가 지난 6월 29일 서울시의회를 통과했다.

긴 논란 끝에 체념하는 상인들도 있었다. 시청광장 지하도상가에서 40년 넘게 음반 가게를 하는 송모(75)씨는 “더 이상 싸울 힘도 없다. 힘없는 우리가 더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권리금도 못 건지는 점포인데, 이전까지 애정이었다면 이젠 오기로 평생 떠나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전국 상인연합회 관계자 역시 “이미 게임 끝났는데, 이제 와서 더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서울시의 '오래가게'로 선정되기도 한 음반 가게 역시 앞으로 권리금을 받고 팔 수 없게 됐다. 임선영 기자

서울시의 '오래가게'로 선정되기도 한 음반 가게 역시 앞으로 권리금을 받고 팔 수 없게 됐다. 임선영 기자

일부 상인들은 시의 결정을 부정했다. 서울의 한 지하상가에서 네일숍을 운영하는 전모(50)씨는 “9년 전에 권리금 6000만원을 내고 들어왔다. 시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 내 재산인데, 권리금 받고 임차권을 팔 것이다”고 말했다. 또 다른 지하상가에서 구두 가게를 운영하는 한모(56)씨는 “영세 상인들에겐 목숨 같은 돈인데 과연 누가 권리금을 포기하겠느냐”면서 “암암리에 불법적으로 권리금 거래가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시청광장 지하도상가는 점심시간에도 일부 커피숍을 제외하고는 한산했다. 임선영 기자

시청광장 지하도상가는 점심시간에도 일부 커피숍을 제외하고는 한산했다. 임선영 기자

서울시 관계자는 “불법이 발생할 수 있고, 형평성에 어긋난 일을 이제야 바로 잡은 것”이라면서 ”상인들을 위한 보상책을 검토하고 있진 않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공익적 관점에서 맞는 방향이지만, 상인들의 재산권을 보호할 현실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정희 서울시립대 행정학과 교수는 “공간을 제공한 건 서울시이지만, 그 안에서 상권을 형성한 상인들의 노력도 인정해야 한다”면서 “몇 년간 임대료 상한선을 정하는 식으로 상인들이 손해를 본 권리금을 보전(補塡)할 방안도 찾아야한다”고 말했다.

임선영 기자 youngca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