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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년 전 모습 하나도 안 변했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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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앞줄 왼쪽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이백천씨, 김성수 성공회대 총장, 조영남·김민기·김세환·송창식·윤형주·이장희·강근식씨.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잖아. 전부 죽을 때가 다 된 게야."

가수 조영남(61)씨가 한마디를 던지자 사람들 사이에 웃음보가 터진다. 듣기에 따라선 꽤 기분 나쁜 말일 수도 있는데 얼굴 찌푸리는 사람 하나 없다. 좌장인 김성수(76) 성공회대 총장마저 박장대소할 뿐이다. 연이은 우스개에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김 총장이 중얼거린다. "그대로야.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하나도."

3일 오후 7시 서울 신라호텔 중식당. 빛나던 젊은 날을 함께했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조씨가 말한 '안 하던 짓'이란 바로 이 만남을 뜻한다. 무려 37년 만에 모였으니….

조영남.송창식(59).윤형주(59).이장희(59).강근식(59.기타리스트).김세환(58).김민기(56)씨. 이들은 1968~70년 당시 성공회 인천교구 사제이던 김 총장과 깊은 우정을 나눴다. 70년대 들어 멤버 전원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스타로 부상하면서 만남 또한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지난해 김 총장을 인터뷰한 기자가 멤버들의 근황을 전하자 김 총장이 "더 늦기 전 한번 봤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해 자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38년 전 멤버들과 김 총장의 만남을 주선한 것은 가요평론가 이백천(73)씨였다. 이씨가 음악감상실 '쎄시봉'에서 활동하던 일단의 무명 아티스트들을 이끌고 평소 친분이 있던 김 총장의 사제관을 찾은 것. 젊은이들은 김 총장을 만난 첫 날부터 좁다란 사제관을 온통 차지하고 앉아 한동안 '집단 기생'을 시작했다. 김 총장은 이들이 가난한 사제관 살림을 다 털어먹어도 단 한번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교회 다녀라' '노래 봉사 좀 해다오' 그런 말씀도 안 하셨어요. 그냥 좋은 형님, 멋진 친구였죠." 이장희씨의 회고다.

윤형주씨는 "그때부터 교회 다녔으면 지금보다들 모두 나아졌을 것"이라는 말로 좌중을 또 한번 웃겼다.

김 총장은 "밝고 착하고 총명한 젊은이들이 그저 좋았을 뿐"이라며 "그들의 젊은 웃음, 노랫소리가 흘러 나오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감사했다"고 회상했다.

멤버들은 이날 음식과 와인을 즐기며 밤 늦도록 추억을 더듬고 사는 얘기를 나눴다. 조영남.송창식.윤형주.김세환씨는 여전히 현역 가수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방송국 '라디오코리아'를 운영하던 이장희씨는 은퇴해 여행가로서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학전' 대표인 김민기씨는 이제 더 이상 노래를 하지 않는다.

조영남씨는 "세상 무서울 것 없던 우리들도 이제 육십 노인이 다 됐다"며 "평생 이웃을 위해 살아온 신부님처럼 뭔가 세상에 도움될 만한 일을 만들어보자"는 말로 자리를 마무리했다.

이나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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