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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간첩잡던 준위가 「대학살 요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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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80년 여름, 언론인대학살로 불리는 8월초의 대규모 해직으로 기진맥진해 있었던 언론계는 이미 그전부터 단속적으로 언론통폐합 이라는 엄청난 소문이 나돌면서 계속 신경을 곤두세워야했다.
폭풍우의 태풍이랄까 여하튼 당시 각 언론사들은 다가올 악몽을 미리 감지나한 듯 불길한 기운에 휩싸여 있었다.
10월 들어서부터 는 『어느 신문사가 없어진다 카더라』는 식의 좀더 구체적인 「카더라」방송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계엄당국의 실권을 쥐고 공직자 숙정 등 개혁작업을 단행했던 보안사는 주목의 대상이었다.
당시 보안사 정보 처 한 간부의 증언.
『개혁작업의 모든 일이 보안사에서 이루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계엄사령부나 국보위나 핵심자리에는 모두 보안사간부들이 나가 있었으니까요. 대민업무를 다루던 정보 처에는 3과가 있었지요.1과가 정치담당, 2과가 행정기관 및 언론담당, 3과가 경제담당입니다. 그러나 2과는 언론파트를 따로 떼어 이상재씨가 주도하는 언론대책 반에 넘기고 행정기관만을 담당 했습니다. 이씨는 당시계급이 육군 준위였지요.
그런데 어느 날 특별보좌관이란 직함과 함께 이사관대우 군무원이 되더군요. 업무도 간첩 잡던 일에서 언론 다루는 일로 바뀌고….
계급사회인 군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인사였지요. 약간의 내부반발이 있었지만 전두환 사령관의 특명으로 그냥 넘어간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간부의 증언에 따르면 이상재씨는 대공출신으로 같은 대공출신인 허삼수씨(통폐합당시 청와대사정수석비서관)의 추천을 받아 일약 실권자들의 측근이 되었다. 매사에 치밀하고 추진력이 강한 그는 곧 전두환 대통령의 신임을 받아 허삼수 청와대사정수석 밑의 2급 비서관이 된다. 이어 그는 전씨의 지명을 받아 허문도 정무비서관과 언론통폐합추진 콤비가 되었다.
언론문제는 전대통령→허문도→이상재로 연결되는 라인에서 구체적인 계획이 입안, 추진되었다는 것이 이 간부의 증언이다. 따라서 권정달씨 후임인 한용원 정보처장도 언론문제만큼은 이씨로부터 보고를 받고 내용을 어렴풋이 파악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씨는 대부분이 장교로 구성되어있는 보안사의 인력을 부리기가 어려웠던지 내부의 조언은 거의 기대하지 않고 현직 언론인·대학교수들을 찾아다니며 자문을 구하거나 통폐합방법을 논의하고 이를 바탕으로 허문도 비서관과 구체적 상의를 했다고 한다.
다만 확정된 계획의 실무적 집행은 보안사가 했다.
한용원 정보처장의 증언에 따르면 11월12일 오후 2시쯤 이광표 문공장관이 언론통폐합결재서류를 갖고 들어와 오후4시쯤 노태우 당시 보안 사령관실에 함께 들어가 전한 후 곧바로 각 언론사 사장들을 보안사령부로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통폐합조치로 경향신문에 흡수당했던 신아일보의 당시 안종석 정치부장과 조태형 체육부장의 증언.
『신아일보는 당시 언론계에서 확실한 근거 없이 국보위 발족초기부터 정리대상일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지요. 소문의 근거는 신아일보가 기자들에게 충분한 월급을 주지 못한 점이지요. 그로 인해 물의를 빚기도 했고 정리 때 지방주재기자들이 올라와 퇴직금을 내라며 농성을 한 적도 있습니다.
장기봉 사장은 소문이 나돌면서 신 군부 쪽에 줄을 대보려고 했으나 신통치 않자 당시 청와대출입기자로 개혁주도 세력들과 친했던 모기자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지요.
출입처에 갔다오면 거의 빠짐없이 사장실에 들러 매일 매일의 상황보고를 했던 그 사람이 7월 하순 들어 갑자기 경향신문으로 자리를 옮겨가더군요.
그러고 나서 중앙일보에 흡수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쑥 들어가고 그 대신 통폐합이 사실이라면 경향으로 가겠구나하는 추측이 나돌았습니다.
장 사장이 전 대통령과 같은 대구공고출신이어서 「혹시나」했던 기대는 11월12일 오후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오후 5시쯤 갑자기 보안사로부터 사령관과 언론사 사장간의 간담회가 있으니 와달라는 전화가 왔습니다. 곧 장 사장을 안내한다며 보안사요원이 찾아오더군요.
장 사장은 자신의 승용차 앞자리에 보안사 요원을 태우고 중앙청(현 국립박물관)옆 보안사령부로 갔습니다. 그런데 안내요원이 전에 언론사 사장들과 간담회를 할 때면 찾아가던 사령관실과는 전혀 다른 쪽으로 차를 가자고 하더랍니다.
이상한 생각이 든 장 사장이 안내자에게 「사령관실은 저쪽이잖아」라고 퉁명스럽게 물었으나 안내자는 뒤돌아 웃으면서 「따라오시지요」라고만 했답니다.
안내된 방문을 열자 책상하나와 의자 두개만 보였고 장 사장은 「아차 당했구나」고 속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곧이어 소령급의 젊은이가 들어와 포기각서에 서명을 하라고 하더랍니다. 장 사장은 「못하겠다」고 버티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승강이는 밤10시가 다되어서야 장 사장의 굴복으로 끝이 났습니다
이 같은 상황은 다른 방에서 진행된 각 언론사 경영주들의 서명과정도 비슷했다.
당시 이 작업을 책임 맡았던 한 정보처장과 김충우 대공처장은 옆방에서 보고를 받으며 늦어지는 방에 대해서는 호통을 쳤다. 어떤 언론사사장은 5분도 안돼 서명을 끝내고 황급히 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중앙매스컴의 경우 홍진기 회장이 『사주가 아니라서 곤란하다』며 서명을 거부해 이병철 회장을 급히 데러와 마무리지었고 동아일보의 금상기사강도 곤욕을 치른 것으로 알려졌다.
신아의 장사 장은 밤10시30분쯤 회사로 돌아와 기다리고 있던 간부들에게 통폐합사실을 알렸다. 모두들 한숨을 쉬며 침통한 표정들이었다.
11월25일 종간호를 내자 보안사에서 요원1명이 더 파견되었다.
그의 임무는 경향문화방송과의 합병작업을 위한 연락관역할이었다.
통폐합실무작업이 본격화되면서 보안사 측은 안정치 부장에게는 감사원 대변인자리, 권모 부국장에게는 농수산부대변인자리를 받으라는 제의가 들어오는 등 반발무마작업을 벌였다.
1백 여명의 기자들은 각자 짐을 싸들고 대규모 이주작업을 시작했으나 모두들 경향신문 측에서 박대하지 않나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일부는 이진희 경향신문사장이 자기들을 일단 받아들였다가 또다시 해직조치를 취하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기까지 했다.
신아일보 케이스와는 달리 서울경제의 경우는 『설마설마』하다가 당한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일보의 자매지였던 서울경제는 11월초부터 정리된다는 소문이 강하게 나돌았지만 『설마 서울경제야 없애겠느냐』고 애써 자위하는 분위기였다고 박병윤 서울경제편집국장(당시 정경부차장)은 말한다.
왜냐하면 당시 4개 경제지 중에서 서울경제가 부수가 많았고 기사수준이 높다는 평가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강재 회장이 12일 오후 보안사령부를 다녀온 뒤 이 같은 희망들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장 회장은 그 날 오후 6시쯤 회사로 돌아와 간부들에게 서울경제가 없어진다는 사실을 침통한 표정으로 전달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경제편집국은 삽시간에 초상집으로 변했다. 여기저기서 울분을 토하는 소리가 높았고 눈물을 흘리는 기자들도 있었다.
그 시간이 마침 지방판을 마감한 직후라 대부분의 기자들이 편집국에 들어와 있었다. 신 군부·특정인물의 이름을 들먹이며 욕을 해대는 기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회사간부들은 무 얼하고 있었느냐』고 울분을 토하는 기자도 있었다.
서울경제기자 60여명은 한국일보와 자매지로 분산배치발령을 받았지만 영업 쪽에서는 아우성이었다. 통폐합사실이 알려지자 광고대금과 구독료의 미수금이 일체 들어오지 않는가 하면 한국일보 쪽에도 그 영향이 미쳤기 때문이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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