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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 양극화' 만은 막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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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대기업처럼 수억원대의 연봉이나 성과급, 스톡옵션은 못 주는 대신 노후자금을 지원해 주는 것이다. 한 보험판매사 간부는 "많게는 월 수백만원씩 보험료를 내주는 회사도 꽤 있다"고 말했다. 이쯤이면 고개가 갸우뚱해질 만도 하다.

고액 연봉도 모자라 임원들에게 은퇴용 보험까지 들어주는 과잉 복지가 웬 말이냐고.

그러나 막상 임원들의 입장은 다르다. 늘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임원이 더 많다는 것이다. 행여 경영 성과가 신통치 않으면 언제라도 보따리를 싸야 한다. 요즘은 40대 초.중반에 임원이 된 사람도 많아 막상 퇴직 후에는 더 막막하기 일쑤다. 자녀가 장성하기 전이라 교육비, 결혼 비용 등 돈 들 일이 줄줄이 이어진다. 노후를 걱정하는 이런 임원들이 얼마나 많았으면 CEO 보험이란 타깃 상품이 다 등장했겠는가.

노후 걱정은 이제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일이 됐다. 샐러리맨이나 CEO나 큰 차이가 없다.

우리보다 앞서 고령화 사회를 맞은 일본의 생생한 사례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요즘 일본 언론에는 '장생(長生) 리스크'란 말이 자주 등장한다. 말 그대로 오래 사는 게 위험하다는 뜻이다. 오래 살수록 경제적 어려움을 피할 수 없으니 맞는 말이다. 미리 준비를 안 하면 은퇴 이후 30~40년간 궁핍한 황혼을 피할 수 없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일본에선 몇 년 전부터 불어닥친 '황혼 이민' 바람이 갈수록 거세진다고 한다. 필리핀이나 태국 등 동남아의 고급 휴양지엔 아예 일본인들만 따로 모여 사는 '미니 일본'까지 생겨나고 있다.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가까운 라구나주의 일본인 퇴직자촌도 그중 한 곳이다. 일본어가 통하는 상가는 물론 노인 간병시설이나 병원 등 각종 편의시설이 함께 들어선 그들만의 공간이다. 최근 국내에도 속속 들어서는 '실버타운'을 그대로 옮겨놓은 곳이다. 저렴한 물가와 쾌적한 주거 환경 덕에 일본 본토 못지않은 삶의 질을 누리고 있다고 한다.

아직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고령화 속도가 빠른 나라다. 2022년이면 국민 여섯 중 한 명은 65세 이상 노인이 되는 초고령 사회로 접어든다. 불과 16년 뒤다. 반면 국민의 노후를 책임질 사회안전망은 턱없이 부실하다.

국민연금은 진작부터 고갈 우려가 나오고 있다. 퇴직금만으로 살기도 버겁다. '정부와 정치권은 손 놓고 뭐하느냐'고 따져봐야 목만 아프다. 완벽한 사회보장제를 자랑하던 독일.이탈리아.프랑스 같은 선진국조차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노후 복지 비용으로 나라 전체가 휘청거린 지 오래다. 급속한 고령화가 연금을 고갈시켰기 때문이다.

노후 준비는 이제 스스로 단단히 해둬야 한다는 게 지구촌 사람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은퇴 후의 생활은 하늘과 땅만큼 갈릴 수 있다. 준비 안 된 노후는 브레이크 없이 내리막길을 달리는 자전거와 같다. 30대건, 은퇴를 앞둔 50대건 지금 당장 자신의 자산 내역을 한번 되돌아보자. 지금부터라도 최선의 전략을 세워 노후를 대비해야 한다. 이대로라면 '황혼 양극화'도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표재용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