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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원가 공개” 또다른 기업 압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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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최근 정부가 주도하는 원가 공개가 산업계를 강타하고 있다. 지난 7일 이동통신요금 원가 공개를 법적으로 의무화하는 법안이 국회에서 발의됐다. 이에 앞서 5월에는 택배업체가 택배요금 원가를 국토부 장관에게 신고토록 의무화하는 법안 개정안이 입법예고됐다. 최근 2년간 이뤄진 업종별 원가 공개 요구는 이 밖에도 ▶프랜차이즈 ▶부동산(분양원가) ▶금융권 금리 ▶자동차 번호판 발급 수수료 ▶휴게소 음식 원가 등으로 전방위적이다.

정부 “소비자보호·갑질근절” 내세워 #통신비·택배 값·수수료 인하 요구 #“여론·정치논리로 이윤 정해지면 #기업들이 경쟁할 이유 없어져”

정부가 원가 공개 카드를 꺼낸 이유는 두 가지다. 원가를 공개해 소비자가격을 내리겠다는 것, 이른바 ‘갑을’관계를 이용해 이득을 내는 관행을 없애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정부의 발상이 반(反)시장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점이다. 이태희 국민대 경영학과 교수는 “원가를 공개하는 순간 여론 혹은 정치논리로 이익률이 정해지므로 기업들은 경쟁할 이유가 없어진다”고 설명했다.

특히 원가는 기업 경쟁력의 출발점이다. 재료비·노무비·경비 등 기업의 혁신역량과 영업기밀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게 원가다. 문철우 성균관대 경영학부 교수는 “공익적인 취지는 이해하지만 생산성·기술력·금융비용 등에 따라 원가는 기업별로 다를 수밖에 없다”며 “원가를 열심히 절감해 경쟁력을 높인 업체에 정부가 나서서 페널티를 주는 격이고 이윤을 죄악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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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원가 공개가 이뤄지는 분야도 있다. 영국·동유럽 등 일부 국가의 경우 공기업에서 민영화된 기업이 공급하는 전력·가스 등의 제조원가는 공개되고 사회적 합의를 통해 가격이 책정된다. 국내에서도 2011년 전기, 열차, 도시가스 도매, 광역상수도 도매요금 등 6개 주요 공공요금 원가를 공개했다. 요금체계를 안정적으로 가져가기 위해서다.

하지만 공공영역과 달리 민간은 수익 창출 극대화가 목적이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독점적인 공공영역과 경쟁이 치열한 민간영역은 시장 자체가 다르다”며 “민간에서는 원가 공개 이슈의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 10대 그룹 계열사 사장은 “원가 구조를 밝히는 건 경쟁사에 자기 패를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전문가들은 경쟁 시장 안에서 원가를 공개하는 것은 득(得)보다는 실(失)이 더 많고 자칫 독(毒)이 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심교언 건국대 경영대학 교수는 “일률적 원가 공개는 정부의 생색내기 정책”이라며 “시장경제 활력을 죽이는 ‘교각살우’식 처방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정부가 나서서 무리하게 원가 공개를 요구했다가 민간의 반발에 부닥쳐 흐지부지된 일이 반복됐다. 2007년 문화관광부는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공연 입장료가 너무 비싸다는 지적에 따라 공연 원가 실태조사에 나섰고, 2010년 국민권익위원회는 석유제품의 원가를 공개하라고 했지만 결국 모두 무산됐다.

세종=서유진 기자 suh.yo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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