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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설운도의 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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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사회 디렉터
김승현 정치팀 차장

김승현 정치팀 차장

임진각에 가본 적이 있나요.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에 있는 ‘실향민의 고향’. 매년 명절이면 이곳 망배단에서 실향민들은 북쪽으로 절을 올린다. 빤히 보이는데도 발 디딜 수 없는 심정이 오죽했을까. 분단 전엔 신의주까지 달렸다는 멈춰선 녹슨 기차를 쓰다듬으며 울분을 달랬을 것이다. 가끔 임진각을 볼 때면 가슴을 적시던 이런 동정심은 예전 같지 않다. 파주의 쇼핑몰이나 맛집의 길목에 있는 관광지 정도로 여겨진다.

다음달로 예정된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대하는 심경도 크게 변했다. 성사되든 안 되든 18년 전(2000년 8월 15일) 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 현장을 취재할 때처럼 속절 없이 눈물이 흐르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 21일 2018 코리아오픈 탁구대회에서 남북 단일팀이 우승했다는 소식도 비슷하게 다가왔다. 혼합복식에서 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땄지만 1991년 지바 세계선수권대회 여자단체전에서 남북 단일팀이 우승했던 감동만큼은 아니다.

그런데 최근 우연히 들른 임진각에서 목석같아진 북한 감성이 자극을 받았다. 가수 설운도 때문이었다. 임진각 앞에는 그가 부른 노래 ‘잃어버린 30년’을 기념하는 ‘망향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비가 오나~/눈이 오나~/바람이 부나~/그리웠던 삼십년 세월~’로 시작하는 트로트 곡이다. 이 노래는 83년 KBS의 특별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의 주제가 역할을 했다. 83년 6월 30일부터 11월 14일까지 138일에 걸쳐 방송된 역사적인 이 프로그램이 초등학교 6학년이던 나는 물론 전 국민을 TV 앞에서 눈이 퉁퉁 붓게 한 기억이 났다.

북한을 벗어났음에도 30년간 만나지 못한 1만189명의 이산가족이 TV를 통해 다시 혈육을 만나 울부짖었다. 전 세계가 감동한 프로그램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이를 소개하는 임진각의 안내문도 만들어졌는데 그 속에 설운도의 사진이 있다. KBS 공개홀에서 덥수룩한 장발로 노래하는 스물다섯 살 신인 가수의 모습이다. 올해 회갑(58년생)을 맞은 설운도의 첫 번째 히트곡에 담겼던 ‘30년’은 이제 65년이 됐다. 다음달 상봉을 꿈꾸는 어느 이산가족들에겐 돌이킬 수 없는 회한의 세월이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무뎌졌을 것이다. 전쟁과 평화를 넘나든 북한의 기나긴 변덕에 기대와 희망은 불감증으로 바뀌었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갑작스레 다가오면서 만들어진 ‘벼락같은 역사’가 당황스러운 이유이기도 하다. 이성과 감성이 모두 혼란스러운 지금, 설운도의 노래가 다시 필요함을 느낀다. 35년간 퇴화해 온 평화와 인도주의의 감성을 되살려야만 새로운 시대를 준비할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김승현 정치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