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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 없이 살 뻔했던 하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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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한별 기자 중앙일보 Product 담당
김한별 디지털콘텐트랩장

김한별 디지털콘텐트랩장

지난 25일 아침 출근했다가 혼비백산했다. ‘1994년 이래 최악’이라는 폭염에 사무실 에어컨이 고장 난 탓이다. ‘요즘 에어컨 수리하려면 최소 1주일은 걸린다’ ‘차라리 새 에어컨 사는 게 빠르다’. 요 며칠 지인들과 메신저로 나눴던 대화가 머리를 스쳐 가며 눈앞이 아득해졌다.

과거 에어컨은 ‘부의 상징’이었다. 올해보다 더 더웠다는 1994년 가구당 에어컨 보유 대수는 0.09대에 불과했다. 하지만 약 20년 뒤인 2013년 이후에는 0.78대가 됐다. 가구당 1대에 육박한다. 소득 수준이 올라가며 ‘사치품’이었던 에어컨이 ‘생활가전’이 된 것이다. 전력거래소가 조사를 중단해 2014년 이후 통계는 알 길이 없지만, 에어컨 판매고가 계속 치솟는 걸 보면 현재 보급률은 2013년보다도 훨씬 더 높을 거다.

하지만 이런 통계를 볼 땐 몇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첫째, 에어컨 보급률은 에어컨 보유 가구 비율과 다르다. 한 집에 에어컨이 2대 이상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집에 에어컨이 있냐 없냐만 따지는 에어컨 보유 가구 비율은 2013년 평균 67.8%다. 100가구 가운데 32가구는 에어컨이 없는 셈이다.

둘째, 소득에 따라 에어컨 보급률이 차이가 크게 난다. 2013년 기준 월평균 소득 100만원 이하 가구의 에어컨 보급률은 가구당 0.23대다. 반면에 월소득 501만원 이상 가구는 1.13대다. 이전보다 격차가 줄긴 했지만 여전히 ‘더위의 불평등’이 존재하는 셈이다.

특히 올해처럼 폭염이 심할 때 ‘더위의 불평등’은 사회보장의 문제, 건강권의 문제가 된다. 질병관리본부는 23일 “온열질환자가 전년 대비 61% 폭증했다”며 건강한 여름나기를 위해 “항상 시원하게” 지낼 것을 당부했다. 작업 환경상 또는 주거 환경상 “항상 시원하게” 지낼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사회는 그들에게 무엇을 해줘야 하나.

박원순 서울시장이 에어컨 없는 옥탑방에서 한 달간 ‘민생 체험’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생각이 많았던 건 그 때문이다. 박 시장의 행보는 에어컨 없는 삶의 고단함을 몸소 느껴보겠다는 취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박 시장과 함께 ‘옥탑방 첫날밤’을 보낸 비서관은 “무더위에 잠을 설쳤다”고 했다. 박 시장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잠을 못 자면 업무 효율이 떨어진다. 이런 ‘극한 체험’이 과연 ‘더위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까.

고장 났던 사무실 에어컨은 회사 시설관리 부서에서 점심시간 전 고쳐줬다.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덕분에 폭염 속에서도 ‘열심히’ 일했고 ‘무사히’ 퇴근했다. 박 시장과 비서관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정치인은 모르겠지만 일반인들은 더위 먹고 밤잠 설치면 제대로 일을 못 한다. 그들에게 일상은 ‘체험’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김한별 디지털콘텐트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