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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 지키려 소화기 샀더니 10년 지나자 범죄자 될 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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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지난 소화기 교체해야…어기면 3년이하 징역

지난달 22일 오후 울산포항고속도로 범서제2터널에서 불에 탄 화물차 앞에 소화기들이 나뒹굴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22일 오후 울산포항고속도로 범서제2터널에서 불에 탄 화물차 앞에 소화기들이 나뒹굴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에 사는 회사원 강모(39)씨의 아파트엔 만든 지 10년 넘은 소화기가 있다. 1월부터 노후소화기를 놔두는 건 불법이다. 강씨는 “불법인걸 알지만 어쩔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소화기를 버리려 소방서에 이달 초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소방서는 "구청에 연락하라"고 했다. 구청 직원은 "관련 조례가 없어 수거가 어렵다"며 전문 폐기업체를 알려줬다. 강씨는 “업체는 소화기 1개 수거 비용 10여만원에 택배비도 요구했다”며 “이 돈까지 내며 소화기를 버려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고 말했다.

개인이 직접 버리려면 10만원 이상 들어

광주 서부소방서 앞에 있는 노후 소화기의 모습. 소방시설법에 따라 10년이 지난 노후 소화기는 성능검사 실시 후 재사용하거나 폐기해야 한다. [광주 서부소방서 제공=연합뉴스]

광주 서부소방서 앞에 있는 노후 소화기의 모습. 소방시설법에 따라 10년이 지난 노후 소화기는 성능검사 실시 후 재사용하거나 폐기해야 한다. [광주 서부소방서 제공=연합뉴스]

분말 소화기 사용연한은 10년이다. 소방시설법에 따르면 10년이 넘은 소화기는 새것으로 교체해야 한다. 소방청 관계자는 "한국소방산업기술원의 성능 확인 검사를 받으면 3년을 더 쓸 수 있지만 검사 수수료가 소화기 구입비용보다 비싸 대부분 폐기한다"며 "아파트 등 다중이용시설 소방시설 관리자가 법을 위반하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내야 한다"고 말했다.

소방당국 "소화기 처리 책임은 지자체"  

지난 2월 서울 동작구의 한 학원 건물에 먼지가 쌓인 소화기들이 놓여 있다. [중앙포토]

지난 2월 서울 동작구의 한 학원 건물에 먼지가 쌓인 소화기들이 놓여 있다. [중앙포토]

문제는 노후소화기 버리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노후소화기 폐기는 허가 받은 업체만 할 수 있다. 시민이 폐기업체에 노후소화기를 보내려면 별도의 처리·물류비용을 내야 한다.

이런 가운데 소방당국과 지방자치단체는 소화기 폐기 업무를 떠넘기고 있다. 올해 초까지 소화기 무료 수거에 나섰던 소방서들은 최근 수거 업무를 중단하고 있다. 소방청 관계자는 “폐기물 처리 책임은 폐기물관리법상 시·군·구 자치단체장에 있다”며 “대형 폐기물인 노후소화기는 수수료 성격의 신고필증(스티커)을 붙여 버리면 지자체가 수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자체 "대형폐기물에 소화기가 없어서…"

 지난 2월 서울 동작구의 한 소방 용품 판매점에 판매 중인 소화기들이 놓여 있다.[중앙포토]

지난 2월 서울 동작구의 한 소방 용품 판매점에 판매 중인 소화기들이 놓여 있다.[중앙포토]

지자체도 수거를 기피한다. 폐기물관리 조례 속 대형폐기물 품목에 소화기가 없다는 게 이유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지자체가 조례를 명확하게 개정하지 않은 탓"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중앙일보가 서울 25개 자치구 폐기물관리 조례를 전수조사하니 대형폐기물 품목에 소화기가 있는 건 영등포구가 유일했다. 영등포구는 소화기 1개당 수수료 3000원을 받고 가져간다. 영등포구 청소과 관계자는 “소방시설법도 바뀌고, 소화기 수거 민원도 많아 지난해 12월 조례를 개정했다”며 “서울에선 선례를 못 찾아 경기도의 한 지자체 조례를 참고했다”고 말했다.

돈이 문제 본질… 양측 모두 폐기 비용 부담
문제의 본질은 돈이다. 서울시 소방재난본부 관계자는 “과거엔 폐기업체가 무료로 소화기를 가져갔지만, 요즘은 비용을 요구한다”며 “예산도 없고, 소화기를 무작정 쌓아둘 수도 없다”고 말했다. 지자체도 마찬가지다. 서울의 한 자치구 청소과 관계자는 “대형폐기물 품목에 소화기가 없어도 비슷한 물품 수수료를 준용해 수거하면 된다”며 “폐기 비용 부담이 수거를 안하는 실제 이유”라고 말했다.

지난 1월 불이 난 서울 종로 3가 쪽방촌에 소방관들이 도착하기 전 주민들이 초기 화재 진압으로 큰불을 막은 소화기들이 놓여 있다.[연합뉴스]

지난 1월 불이 난 서울 종로 3가 쪽방촌에 소방관들이 도착하기 전 주민들이 초기 화재 진압으로 큰불을 막은 소화기들이 놓여 있다.[연합뉴스]

한국소방산업기술원은 향후 3년간 폐기할 노후소화기가 약 237만여 개라고 추정한다. 2009년 199만개던 분말소화기 생산량은 지난해 637만대로 늘었다. 소방청 관계자는 “소방시설법 개정안 시행으로 올해 생산량은 1000만개가 넘을 것”이라며 “노후소화기 수도 매년 증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 "소화기 가격에 폐기비용 반영해야" 
노후소화기는 불이 났을 때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 때문에 사고를 키울 수 있다. 2000년 이전에 만든 가압식 소화기는 폭발위험도 있다. 2013년 서울 영등포에선 가압식 소화기로 불을 끄려던 60대 남성이 소화기 폭발로 숨졌다.

분말소화기 생산대수 변화.[자료 : 소방청]

분말소화기 생산대수 변화.[자료 : 소방청]

공하성 교수는 “일본은 소화기 구입가에 노후소화기 처리 비용을 반영해 예산을 확보함으로써 시민이 무료로 소화기를 버릴 수 있다”며 “법으로 소화기 사용기한을 제한했으면 시민이 편하게 소화기를 버릴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승호 기자 wonder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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