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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루기] ‘선제 실점’은 이제 그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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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러시아 월드컵이 끝났다. 우리 팀이 경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가장 마음 졸일 때는 무엇보다 선취 득점을 허용하는 경우다. 먼저 골을 넣는다면 조금은 덜 마음을 졸이면서 볼 수 있을 텐데 먼저 골을 먹는다면 초조감이 더욱 커진다. 이처럼 상대 팀에게 먼저 골을 허용하는 경우 “선제 실점했다” “선제 실점을 허용했다” “선제 실점을 당했다” 등과 같이 ‘선제 실점’이란 말을 자주 사용한다. 상대 팀이 ‘선제 득점’을 하면 우리 팀은 ‘선제 실점’을 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선제 실점’이란 표현에 대해서는 다소 생각해볼 부분이 있다. ‘선제골’ ‘선제 득점’ 등에서 쓰이는 ‘선제(先制)’는 ‘먼저 선(先)’ 자와 ‘억제할 제(制)’ 자가 만나 이루어진 단어로, 선수를 쳐서 상대편을 제압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선제골’은 선수를 쳐 상대편을 제압하는 골이란 의미가 된다. ‘선제 득점’ 또한 선수를 쳐 상대편을 제압하는 득점이란 뜻이 되므로 ‘선제’와 ‘골’ 또는 ‘득점’은 자연스럽게 결합한다. ‘선제 실점’이 문제다.

‘선제 실점’이라고 하면 선수를 쳐 상대편을 제압하는 실점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실점을 해서는 상대를 제압할 수 없으므로 ‘선제 실점’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제골을 허용했다” “선제 득점을 당했다” 등으로 고쳐 써야 한다.

굳이 ‘선제 실점’ 형태를 취하고 싶다면 ‘선 실점’이라고 하면 된다. ‘제’ 자를 빼고 ‘선 실점’이라고 하면 점수를 먼저 잃는 것을 뜻하므로 의미상 문제가 없다. 따라서 “선 실점을 했다” 등으로 표현하는 것은 괜찮아 보인다.

‘선제’를 ‘먼저’ 정도의 뜻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선제 실점’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선제’는 상대편을 먼저 제압하는 경우에만 쓸 수 있다. ‘선제 득점’ ‘선제 홈런’ ‘선제 타격’ ‘선제 공격’ 등은 괜찮지만 ‘선제 실점’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김현정 기자  nomadicwrit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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