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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낭만주먹 낭만인생 34. 파리의 집시생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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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집시들의 길거리 공연 장면. 1960년대 말 필자는 프랑스 파리에서 6개월간 집시생활을 했다. [중앙포토]

그런대로 화려했던 2년, 비참한 1년. 30대 시절을 보냈던 1960년대 후반 프랑스 파리 생활 3년은 그렇게 선명하게 둘로 구분된다. 끈 떨어진 갓 신세였던 마지막 1년은 정말 참혹했다. 심지어 집시생활까지 해봤으니 말이다.

그런 전락은 차이나타운의 중국집 주인과 말다툼 끝에 대책없이 헤어졌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우습기도 한 정치 논쟁 때문이다. 나보다 30살 위인 그 사람은 3.1운동 이후 망명했던 사람인데, 정치 성향이 괴팍했다. 나도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따라서 그런 얘기로 종종 티격태격했다.

"당신 따위 밑에서 일하지 않겠다."

말다툼 중간에 버럭 화를 내고 뛰쳐나왔다. 내가 바보다. 그 분은 간호사 부인과 사별한 뒤였고, 외로움 때문에 종종 나를 붙잡고 울던 분이었는데…. 뛰쳐 나온 그날 밤 이후 센강 주변에서 새우잠을 잤다. 낮이면 전철에서 꼬박꼬박 졸면서 언 몸을 녹였다. 하지만 나와 싸운 일이 있었던 스페인계 주먹 따위는 찾지 않았다. 호랑이는 비록 굶더라도 토끼 사냥은 하지 않는 법이니까.

허기진 데다가 몸까지 좀 약해졌는지 문득문득 환영까지 어른거렸다. 서울에 계신 우리 어머니, 그리고 한국전쟁 때 헤어진 이복 형님…. 여하튼 그렇게 사는 내 꼴이 얼마나 형편없게 보였던지 집시 패거리가 접근해왔다.

"당신, 노래할 줄 아나? 몰라! 악기 다루는 것 있어? 그러면 우리가 공연할 때 모자나 돌려라. 오케이?"

그렇게 그들을 따라다녔다. 한 6개월을 집시로 떠돌았으니 세상 구경은 제대로 한 셈일까? 집시들의 여유와 낭만을 그때 제대로 알았다. 애완견을 기르던 이도 있었고, 아침이면 깨진 거울에 코를 박은 채 면도까지 한 뒤 넥타이를 매고 나가던 멋쟁이도 있었다.

집시생활에서 벗어나는 기회는 정말 우연히 찾아들었다. 시내의 샹젤리제 거리를 터벅이며 걷다 보니 어느 건물에 나를 찾는 광고가 붙어있지 않던가. 그것도 눈에 확 띄는 한글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내 삶에는 그런 소설 같은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

"방배추 형. 고생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혹시 이 글을 보면 8층 옥탑방의 문 앞에 있는 헌 양말 안에서 제 방의 열쇠를 찾으십시오. 박진만 올림"

박진만, 그는 파독 광원 출신이었다. 신학대 출신의 엘리트였던 그를 허겁지겁 찾아갔다. 그의 주선으로 접시닦이로 다시 취직했다. 바로 그 즈음에 유럽생활에 넌더리가 났다. "지긋지긋하다"며 뒤도 안보고 떠났던 한국이지만, 그때 귀국을 결심했다. 한푼 두푼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서울을 다시 찾은 것이 70년 9월이다. 비행기 삯이 가장 싼 코스인 함부르크.알래스카.도쿄를 거쳐 김포공항에 내렸다. 유럽생활 6년을 끝낸 나는 30대 후반. 결혼도 못했다. 하지만 서울에서 그렇게도 많은 일들이 나를 기다릴 줄은 생각도 못했다.

배추 방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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