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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배구 소-페루전|「힘에 밀린 탄력」…막판 5번타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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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그것은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힘든 기적이었다.
정말 의외였다. 그대로 관중의 허를 찌르고만 승부의 의외성은 경기장의 충격으로 변했다.
긴장과 흥분의 2시간30분-.
감독과 선수, 6천5백여 관중들은 뜻밖의 결과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리드와 역전, 그리고 반전…. 거듭되는 혼미된 상황은 한편의 드라마처럼 엮어져 갔다.
힘의 배구와 탄력의 배구가 맞붙은 이날 한판은 소련이 힘의 배구로 승리를 장식했다.
소련은 천길벼랑에서 한 포기의 풀을 움켜쥔 채 헤쳐 나온 듯 했다.
소련은 처절할이 만큼 사력을 다한 후회없는 한판으로 기록할 것이다.
경기초반 이날 승리의 기운은 페루쪽으로 확실히 기울었다.
한국출신의 박만복 감독이 이끄는 페루를 일방적으로 응원하던 한국관중들은 마치 한국팀이 우승이라도 하듯 축배를 들려던 참이었다.
마의 3세트 12-6의 스코어. 페루의 리드 속에서 대역전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페루는 1세트부터 수비가 크게 흔들렸던 소련을 화려한 양사이드·중앙공격으로 밀어붙였다.
페루의 26살 동갑나기인 좌우공격수 「기나·토레알바」와「세실리아·티트」, 1m96㎝의 중앙공격수 「페레즈·가브리엘라」가 게임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고무공처럼 튀어오르는 양사이드의 고공강타와 「가브리엘라」의 철벽블로킹은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며 소련의 수비벽을 허물어 뜨렸다.
1세트를 15-10으로 마무리지은 페루는 2세트 들어 속공으로 전략을 바꾼 소련에 「가브리엘라」-「파자르도·데미세」의 콤비블로킹으로 대응하며 맞섰다. 그러면서 소련의 확실한 왼쪽 스파이커 「이리나·스미르노바」(20·1m85㎝)의 공격을 차단, 게임의 리듬을 페루쪽으로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코트의 악녀」로 불리는 「스미르노바」의 공격차단은 소련으로서는 치명적인 상처였다.
득점원의 플레이가 봉쇄당한 소련은 속수무책인 채 2세트를 페루에 15-12로 내주었다.
운명의 3세트로 접어들었다. 페루는 에이스 「세실리아」 가속공·왼쪽 대각선 공격·블로킹으로 신들린 활약을 보이며 12-6으로 자멸하다시피 한 소련을 크게 앞질러 나갔다.
앞으로 3포인트.
페루는 금메달고지에 바짝 다가섰다. 순간 페루의 우승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련선수들은 그러나 이상할이 만큼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지칠 줄 모르는 싸움닭으로 변한 것 같았다.
엉성하던 소련의 수비가 확연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물수비를 바탕으로 「스미르노바」가 신기에 가까운 전천후 폭격기로 돌변하며 페루코트를 돌진하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승리에 도취해버린 페루는 이때쯤 맥이 풀린 듯 체력의 열세를 현저히 드러냈다.
페루는 예선전과 준결승 4차례의 경기를 치르면서 3차례나 풀세트 접전을 벌이는 등 지나치게 체력을 소모해 버린 것이다.
3세트 후반 우리를 벗어난 야생동물처럼 펄펄 뛰던 페루선수들의 점프력이 눈에 띄게 낮아졌다.
체력과 불타는 투혼으로 맞서던 소련은 3세트에서 잇달아 6득점, 12-12의 타이를 만든 후 보조공격수 「이리나·파콤초크」가 공격에서 수훈을 세우며 극적으로 위기에서 탈출, 15-13으로 멀리 달아났다.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소련은 여세를 몰아 기진맥진해버린 페루가 공격페이스를 찾기 전에 게임을 15-7로 마무리, 세트올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것도 기적에 비견할만한 파란이었다.
팀웍을 정비한 페루는 5세트에서 소련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상황을 연출했다.
7-7, 10-10, 12-12, 13-13, 14-14, 타이를 계속했다.
듀스에서 득점을 주고 받는 공방전이 계속됐다.
페루의 서브공격이 성공하는 순간 스코어는 15-14, 페루리드로 돌아섰고, 다시 소련의 「타티아나·시도렌코」가 왼쪽 공격을 성공하며 15-15로 재타이.
관중은 흥분했고, 양쪽 벤치는 하얗게 질려있었다.
그순간 소련의 시도렌코가 다시 왼쪽 공걱과 블로킹을 성공하며 2득점을 추가, 대역전의 드라마는 끝내 펼쳐지고 말았다.
이로써 74년 페루감독을 맡은 후 LA대회 4위에 이어 첫 금메달을 안으려던 박 감독의 꿈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박 감독은 『소련이 너무 달라졌다. 우리는 체력에 밀렸다. 그동안 체력을 너무 소모한 것이 패인』이라고 지적했다.
이날 전무후무할 빅게임을 손에 땀을 쥐고 봤다는 배구인들은 『64년 동경올림픽에서 일본에 패배한 이후 사양길을 걷던 소련배구가 살아났다. 수비만 보강한다면 64년 이전에 세계배구코트를 누비던 여왕자리를 계속 이어갈 것 같다』고 평했다.
한편 대역전드라마를 펼친 소련의 「니콜라이·카포」감독은 『페루는 정말 무서운 팀이다. 오늘 우리에게 기적이 일어났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 한판은 서울올림픽이 만들어 낸 불멸의 명승부로 기록될 것이다. <방원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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