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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궁 선수 멘털 배웠다, 우상 소렌스탐 넘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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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대회 마지막 날 3번 홀에서 티샷을 하는 김세영. 부진 탈출을 위해 그는 최근 드라이버를 LPGA투어 데뷔 때 사용했던 제품으로 교체했다. [AFP=연합뉴스]

대회 마지막 날 3번 홀에서 티샷을 하는 김세영. 부진 탈출을 위해 그는 최근 드라이버를 LPGA투어 데뷔 때 사용했던 제품으로 교체했다. [AFP=연합뉴스]

“처음엔 마음을 비우고 샷을 했는데 대회 중반 이후엔 점점 기대가 커지더라고요. 이렇게 값진 기록을 세우다니 정말 기쁩니다.”

LPGA ‘최소타 신기록’ 김세영 #72홀 31언더파, 소렌스탐 기록 경신 #손베리 크리크 LPGA 클래식 우승 #어니 엘스 PGA투어 기록과도 타이 #“빨간 바지 마법 이번에도 통했죠”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대회 72홀 최소타 기록을 작성한 김세영(25·미래에셋)의 목소리는 날아갈 듯했다. 9일 미국 위스콘신주 오나이다의 손베리 크리크 골프장에서 끝난 손베리 크리크 LPGA 클래식에서 그는 합계 31언더파 257타를 기록, 2001년 3월 스탠더드 레지스터 핑에서 안니카 소렌스탐(스웨덴)이 세웠던 72홀 최소타(27언더파) 기록을 4타 경신했다. 14개월 만에 우승하면서 LPGA 통산 7승 고지에 올랐다. 우승 상금은 30만 달러(약 3억3000만원).

김세영은 이날 중앙일보와 전화 인터뷰에서 “어렸을 때 소렌스탐의 경기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년 전 소렌스탐과 타이기록을 세웠는데 이번엔 이 기록을 넘어서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꿈이 이뤄졌다”는 말로 기쁨을 표현했다. 그는 또 “이번 대회를 앞두고 굉장한 각오를 하고 나갔다. 마음을 다잡고 최선을 다했는데 그 덕분에 매일 좋은 스코어가 나왔다”면서 “골프 인생에서 가장 차분하게 플레이한 결과 대기록을 작성했다”고 말했다.

LPGA투어에 데뷔한 2015년 3승을 거둬 신인상까지 받았던 김세영은 2016년 2승에 이어 지난해는 1승을 거뒀다. 그러나 올해는 14개 대회에서 톱10에 오른 게 단 두 차례뿐이었다. 지난 2일 끝난 시즌 세 번째 메이저 대회인 KPMG 여자 PGA 챔피언십에선 공동 25위에 머물렀다. 메이저 대회였던 만큼 기대도 컸지만, 성적은 중위권에 그쳤다. 김세영은 “준비를 많이 했는데도 결과가 좋지 않아 실망이 컸다”며 “이번 대회를 앞두고 LPGA어 4년째를 스스로 냉정하게 돌아봤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또  “지난해 리우 올림픽에 출전한 뒤엔 뚜렷한 목표가 없어서 많이 방황했다. 무엇보다도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다”면서 “첫 해, 이듬해는 아무것도 모르고 열심히 달렸는데 3년 째인 지난해엔 뭔지 모를 혼란스러움의 1년을 보냈다. 그리고 4년 째에도 혼란이 이어지고 있었다”고 분석했다.

우승 트로피와 함께 자축 메시지를 내보이는 김세영. [사진 스포타트]

우승 트로피와 함께 자축 메시지를 내보이는 김세영. [사진 스포타트]

지난주 여자 PGA 챔피언십을 치른 뒤 김세영은 장비부터 마음가짐까지 모든 걸 싹 다 바꿨다. 무엇보다도 8년 동안 썼던 스카티 캐머런 뉴포트2 퍼터를 신형 모델로 바꿨다. 드라이버도 LPGA투어에 처음 데뷔했을 때 사용했던 모델(테일러메이드 SDR)로 교체했다. 또 그는 양궁대표팀의 심리 훈련을 돕는 김영숙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KISS) 연구원의 도움을 얻어 멘털 트레이닝도 했다.

김세영은 “선생님(김영숙 연구원)이 강조하신 말 중에 ‘항상 겸손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인내심을 갖자. 그러면 좋은 일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자’는 생각을 가졌다”고 말했다. 그는 또 멘털과 집중력을 강화하기 위해 다른 선수들의 경기 내용이 담긴 동영상도 찾아보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마음을 비우고 출전한 이번 대회에서 김세영은 완전히 다른 골퍼가 됐다. 무엇보다 그의 장점인 몰아치기 능력이 되살아났다. 그는 크지 않은 키(1m63㎝)에도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태권도를 하면서 힘을 길렀다. 이번 대회에서도 강력하면서도 정교한 ‘컴퓨터 샷’이 살아났다. 평균 드라이버샷 거리는 274.8야드나 됐고, 그린 적중률은 72홀을 도는 동안 무려 93%에 달했다. 김세영은 “코스가 굉장히 편했다”고 말할 만큼 72홀 전체를 자신의 무대로 만들었다. 지난해 22언더파로 우승했던 캐서린 커크(호주)는 “김세영은 마치 우승하는 법을 알고 샷을 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마지막 날 빨간 바지를 입는 것으로 잘 알려지는 김세영은 이날도 빨간 바지를 입고 나와 신들린 듯한 샷을 뽐냈다. 최종 라운드에서 빨간 바지를 입고 역전승을 여러 차례 거둔 덕분에 그의 별명도 ‘빨간 바지의 마법사’다. 김세영은 “초등학생 때부터 빨간 바지를 즐겨 입었다. 그때부터 빨간 바지만 100벌 이상 입었고, 지금도 10벌 넘게 갖고 있다. 빨간 바지만 봐도 긍정적인 에너지와 자신감이 생긴다”면서 “지금껏 LPGA투어의 모든 우승은 빨간 바지를 입고 이뤄낸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마지막 날 빨간 바지를 입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세영이 이날 세운 최저타 기록(31언더파)은 2003년 미국프로골프(PGA)투어 메르세데스 챔피언십에서 어니 엘스(남아공)가 작성한 72홀 최저타와 동타다.

김세영은 “가능하면 빨리 내 기록도 깨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기록이 깨지면 아깝지 않겠느냐고 물으니 그는 “기록은 깨지라고 있는 것이다. 다른 선수들이 내 기록을 깨면 나는 새로운 기록에 다시 도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대기록을 세우고 우승을 차지했지만 가족들과 함께 ‘짜장 라면’을 먹으면서 조촐하게 파티를 한 그는 “내가 미국에 건너온 건 내가 가진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서였다. 더 많은 기록을 세운 뒤 먼 훗날 ‘진정한 프로골퍼 김세영’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김지한 기자 kim.jih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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