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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실학'은 어디서 오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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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예를 들어보자. 19세기 '조선학'은 망국의 설움을 안고 출발했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용납할 수 없었던 지식인들은 조선의 문물과 정신을 드높이고, 그를 통해 민족적 단합과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했던 것이다. 신채호는 망국의 주범인 유교를 그토록 싫어했다. "진시황이 좀 더 오래 살아 경전을 몽땅 태워버렸어야 했는데…." 이에 대해 일본인들은 식민 지배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실태조사로 방대한 실증적 연구를 진척시켰다. 두 학문의 성과물은 전혀 다르다.

해방이 되고 근대화가 지상 과제로 등장했을 때 전통시대 연구의 중심은 실학으로 모아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전통의 너른 저택에서 이른바 '근대적' 요소가 될 만한 것들은 샅샅이 뒤져내 영광과 찬양의 이름표를 얻었다. 가끔 성형과 날조도 없지 않았지만 그 후 50년 동안 실학은 근대의 시선이자 근대화의 조력자로서 자신의 의무와 역할을 충실히 해 왔다.

그런데 그만, 근대화에 성공하고 우리는 그 성취에 자신감을 갖게 됐다. 이 성취가 그동안 학문의 중심이었던 실학을 크게 뒤흔들어 놓았다. 근대의 콤플렉스가 사라짐으로써 실학의 유효성이 떨어진 것이다. 나는 인문학의 위기, 그 진원지를 여기라고 생각한다. 이제 좀 엉덩이 붙이랬더니, 등을 떠밀렸고, 마음 가득 억울함은 가득한데, 아직 새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심정에 비유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돌아갈 길은 없다. 새 길을 개척하는 수밖에…. 듀런트가 지적했듯이 "악덕이란 아직 적응하지 못한 과거의 흔적"이다. 길은 어디에 있을까. 필요한 새 지식은 무엇이고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할 것인가. 이게 고민 중 고민이다. 근대의 서치라이트가 너무 강렬해 전혀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과학이나 기술, 민주의 기치 아래 잊혔던 삶의 실상과 교제, 관계와 놀이 등이 혹은 재미로, 혹은 교양으로, 또는 원리로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요컨대 이제 그만 변명을 그치고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싶어하고, 또 권위와 저항 너머에서 실물적 지식과 정보를 알고 싶어한다. 분야는 다양하고 쓸모 또한 예측을 불허한다. 예를 들면 조선조의 고급 문화가 있다. 20세기 동안 유교의 사대부 문화는 적극적 평가를 받지 못했다. 선비들이란 변변한 직업도 없이 공리공론에 몰두하느라 민생에 절실한 경제나 기술, 사회개혁에는 젬병으로 무책임했던 사람들로 낙인찍혀 왔던 것이다.

왼쪽에는 실학이 근대화에 대한 실패를 묻고, 오른쪽에는 민중이 권위적 억압에 대한 책임을 다그쳐 조선의 유교 문화는 오랫동안 '짜부' 신세였다. 뿐인가. 왕실은 더하다. 지금도 왕실 문화의 중요성을 말하면 인상을 쓰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니 개발한 콘텐트도 빈약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졌지 않은가. 유교나 왕실의 책임은 20세기 100년이면 충분하다. 삶은 계속된다. 앞길을 헤쳐나가기 위해, 새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과거 돌아보기를 멈출 줄 알아야 한다.

예로 그 짜부라진 틈새에서 찾아낸 귀한 콘텐트가 영화와 드라마로 부활해 아시아를 감동시키고 있는 것을 보라. 그 콘텐트 개발과 연구는 이제 시작이다. 전통의 광맥을 탈이념적으로 탐사하는 대규모 프로젝트가 있어야 한다. 이 일에 문화관광부와 교육부가 함께 손을 잡고 협력했으면 좋겠다. 연구 없이 고급 콘텐트는 만들어지지 않고, 콘텐트로 소통되지 않는 연구는 불모이다.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