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CVID가 왜 ‘강도적 요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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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지난 6~7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친서를 품에 넣고 평양을 찾은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세 번째 방북이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폼페이오 장관은 1·2차 방북 때 장시간 면담했던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만나지도 못했다.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과의 마라톤회담에서도 딱히 얻은 게 없다는 듯하다. 비핵화 핵심 사안을 논의할 ‘실무 그룹’ 구성에 합의했다는 발표가 전부였다. 당초 북·미 정상 간 ‘빅딜’의 대상이었던 비핵화 이슈가 장관(폼페이오·김영철)급 협상으로 격하된 데 이어 실무 그룹(차관보급)에서 다루는 수준까지 추락했으니 문제가 심각하다.

북, 비핵화 미루며 보상만 주장 #3차 방북 폼페이오 빈손 귀국 #한·미, 낙관 대신 냉정한 대처를

게다가 북한은 폼페이오가 빈손으로 평양을 떠난 지 5시간 만에 외무성 대변인 성명을 내고 미국을 강력히 비난했다. 특히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를 “미국의 강도적 심리가 반영된 강도적 요구”라고 했다. 영문판에선 ‘깡패 같은(gangster-like)’이란 표현까지 썼다. CVID는 2006년 북한의 첫 핵실험 이래 유엔 안보리가 10차례 넘게 낸 대북제재 결의안에 단 한 번도 빠짐없이 들어간 국제사회의 일관된 합의다. 북한이 이를 ‘강도짓’에 빗댄 건 비핵화 의지가 확고하지 않다는 의사를 국제사회에 대놓고 선언한 것이나 다를 바 없으니 유감스럽다. 오죽하면 폼페이오 장관이 “우리 요구가 깡패면 세계가 깡패”라고 받아쳤겠는가.

북한은 상황의 본질을 직시해야 한다. 지금 진행 중인 북·미 대화 프로세스는 국제사회의 초강경 제재로 코너에 몰린 북한이 우리 정부를 통해 미국에 ‘완전한 비핵화’ 의사를 전하면서 시작됐다. 이 약속은 6·12 북·미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본인의 입으로 재확인됐다. 그러나 회담 뒤 한 달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북한은 비핵화 본질에서 한 발짝도 나아간 게 없다. 중국을 잇따라 찾아 경제지원을 약속받고, 비핵화 시간표를 최대한 늦추려는 모습만 보여 왔다. 이런 마당에 어렵사리 성사된 폼페이오 장관의 세 번째 방북마저 무위에 그치면서 워싱턴 조야에선 대화 무용론과 압박 재개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북한은 정녕 초강경 제재와 전쟁의 공포로 고통 받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가. 그렇지 않다면 속히 비핵화 조치에 착수하는 것밖에 길이 없음을 명심하기 바란다.

한·미의 냉정한 대처도 절실하다. 모처럼 얻은 비핵화와 평화의 기회는 살려야 한다. 하지만 가시적 성과에 급급해 북한의 ‘선의’에 과도하게 기대는 전략은 경계해야 한다. 대화 기조를 유지하되 제재의 고삐를 늦추지 말고 북한이 현실성 있는 비핵화 시간표와 사찰 방안을 내놓도록 압박할 필요가 있다.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북한 외무성 성명은 말미에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신뢰심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사상 초유의 북·미 데탕트 기회를 날릴 경우 입을 손실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평양 당국도 잘 알고 있다는 얘기다. 한·미는 섣부른 장밋빛 낙관론을 경계하면서 이 기회를 살려 채찍과 당근의 적절한 배합으로 북한의 비핵화를 끌어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