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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선영의 IT월드]대통령도 독려한 '규제 혁신'… "체감 못한다"는 기업들

중앙일보

입력

규제 풀자며 ‘배민’ 대표 모셨지만…카풀 앱 9개월 헛바퀴

지난달 26일 서울 광화문 일자리위원회 사무실에서 열린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4차위) 회의에는 정부 측 위원 6명이 모두 불참했다.

'용두사미' 4차위, 장관들 전원 불참 #민간 위원 “보고만 받는 수동적 회의” #차량 기반 공유경제 산업 도산 위기 #“실망한 기업들 외국으로 나갈 것”

4차산업혁명과 규제 혁파를 주요 정부 기치로 내건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9월 만든 4차산업혁명위원회는 민간 전문가 19명과 5개 주요 정부 부처(과학기술정보통신부·산업통상자원부·고용노동부·중소벤처기업부·국토교통부) 장관, 청와대 과학기술보좌관으로 구성된 매머드급 위원회다.

문재인 대통령(가운데)이 지난해 10월 서울 마포구 상암동 에스플렉스센터에서 열린 4차산업혁명위원회 1차 회의에 참석했다. 문 대통령 왼쪽은 4차위 소속 정부 측 위원인 유영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오른쪽은 4차위 위원장을 맡은 장병규 블루홀 창업자다. 매머드급 위원회로 출발해 주목받았던 4차위는 출범 당시부터 논란이었던 카풀앱 문제를 아직까지 한 번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 대신 상대적으로 이해관계가 덜 첨예한 스마트시티·데이터 문제 등만 언급하고 있다. [사진 청와대]

문재인 대통령(가운데)이 지난해 10월 서울 마포구 상암동 에스플렉스센터에서 열린 4차산업혁명위원회 1차 회의에 참석했다. 문 대통령 왼쪽은 4차위 소속 정부 측 위원인 유영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오른쪽은 4차위 위원장을 맡은 장병규 블루홀 창업자다. 매머드급 위원회로 출발해 주목받았던 4차위는 출범 당시부터 논란이었던 카풀앱 문제를 아직까지 한 번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 대신 상대적으로 이해관계가 덜 첨예한 스마트시티·데이터 문제 등만 언급하고 있다. [사진 청와대]

그러나 이번 4차위 회의에는 유영민·백운규·김영주·홍종학·김현미 장관과 문미옥 과학기술보좌관은 모두 보이지 않았다. 장관들의 빈자리에는 해당 부처 차관들이 대리 참석했다. 이날 회의가 여느 때보다 더 큰 관심을 받은 것은 국내 1위 카풀 애플리케이션(앱) 업체인 ‘풀러스’가 규제 벽에 가로막혀 영업이 힘들어져 직원 70%를 해고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였기 때문이다.

표류하는 정부의 신산업 정책…규제 기구만 난립 

4차위는 지난해 출범 이후 “카풀 앱 문제를 민·관 협의를 통해 주도적으로 해결해보겠다”고 줄곧 외쳐온 곳이다.

대통령 직속 기구인데다 현 정부의 규제 혁파 의지가 가장 뚜렷하게 반영된 곳이라 국내 정보기술(IT)·스타트업 업계에서 거는 기대가 컸다. 그러나 결국 카풀 문제가 1년 가까이 논의 한 번 제대로 못 해보고 표류하면서 4차위와 정부의 혁신 의지에 대해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민간 위원은 4차위의 실상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구체적인 비전을 놓고 위원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우리가 이렇게 한 번 해봅시다’라며 적극적으로 의논하는 자리가 아니다. 우선 정부 부처에서 데이터·스마트시티 등 여러 안건을 올린다. 위원들은 이에 관한 자료를 미리 받아 읽어보고 간단히 의견을 내고 심의한다. 매번 회의 때마다 보고만 받는 수동적인 회의의 연속이다. 규제 혁신은 정부의 우선순위가 아니더라.”

이렇다 보니 4차위는 지난 9개월간 카풀 앱 문제는 제대로 다루지도 못했다.

“택시업계 눈치 보느라 대안 못 내놔”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카풀 앱 논란은 출퇴근 시간 외 카풀 영업을 무조건 불법으로 규정한 현행 운수법이 시발점이다.

풀러스 등 기업들은 “출퇴근 시간을 90년대처럼 오전 7~9시, 오후 6~8시로 규정하는 운수법을 바꾸고 우버·풀러스 등도 영업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국택시노동조합연맹 등 관련 단체들은 4차위가 주관하는 민·관 해커톤(토론)에 불참했다. 서울시와 국토교통부는 카풀 앱 문제에 대해 서로 책임을 미루기만 했다. 또 다른 카풀 앱인 ‘럭시’의 운전자들은 운수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소환되기도 했다. 그사이 4차위는 핀테크·스마트시티 등 이해관계가 상대적으로 첨예하지 않은 문제들만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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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서는 우버(미국)·디디추싱(중국)과 같은 글로벌 차랑 공유기업들의 기업가치가 수십조원에 달할 만큼 관련 산업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정부가 주저하면서 차량 기반의 공유경제 산업은 모조리 도산 위기에 처해있다.

▶글로벌 차량 공유기업 기업가치

- 중국 '디디추싱': 560억 달러

- 미국 '우버': 680억 달러

- 말레이시아 '그랩': 60억 달러
- 인도네시아 '고젝': 50억 달러

정부가 규제 혁파에 아예 손을 놓은 것은 아니다. 각 부처는 지금도 신산업을 가로막는 고질적인 규제 문제를 타파하기 위한 여러 기구를 운영하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5일부터 산업부·중기부 등 관계 부처, 지방자치단체들과 함께 충북 오송, 경북 구미 등 6개 국가산업단지와 드론·스마트공장 관련 업체들을 방문하는 ‘투자지원 카라반’(현장방문단)을 가동하고 있다. 산업 현장에서 각종 애로 사항과 규제 문제를 직접 듣기 위해서다.

정부 옴부즈맨·TF는 홍보대사에 그쳐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지난달 28일 인기 배달 앱 ‘배달의 민족’을 창업한 김봉진 우아한형제들 대표를 ‘혁신성장 옴부즈맨’으로 위촉했다. 김 대표는 앞서 옴부즈맨으로 위촉된 박정호 SK텔레콤 사장과 함께 규제를 풀기 위해 정부와 벤처기업간 창구 역할을 하게 된다.

규제 개혁 주무부처로 꼽히는 국무조정실은 민·관 합동 규제개선 추진단과 신산업규제혁신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1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4차산업혁명 시대의 걸림돌을 제거하겠다”며 ‘사필귀정 TF’(4차 산업혁명에 필요한 사항을 귀 기울여 바로 잡는 TF)를 만들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국무조정실에서 규제 혁신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신산업규제혁신위원회에서는 그간 400건의 규제를 해결했다. 이번에는 ‘우선 허용, 사후 규제 체제’를 적용할 과제를 40개 더 발굴해 총 78개의 과제가 ‘우선 허용 체제’ 과제로 선정했다. 사전에 문제를 미리 발굴해 싹을 잘라버리겠다. 사전 허용체제의 ‘끝판왕’이다.”

끝판왕 정책을 내놨다고 자평하며 숫자로 성과를 읊는 정부와는 다르게 스타트업들은 여전히 규제에 대한 불만과 실망감으로 가득한 분위기다. 특히 기업들은 “산업 현장에서 피부로 체감할 수 있는 정부 정책이 사실상 없다”고 지적한다. 옴부즈맨 역시 정부 부처에서 정책 홍보를 위해 으레 선정하는 ‘홍보대사’ 역할 정도에 그칠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카풀앱 ‘럭시’를 만든 최바다 대표는 “정부는 택시업계 눈치만 보느라 대안 하나 내놓지 못한다”며 “그 사이에 스타트업들은 투자자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는 압박을 받아 사업이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국내 소규모 의류 브랜드의 해외 판매를 중개하는 ‘쿠딩’을 만든 김영일 공동창업자는 “한국 기업들의 수출을 돕기 위해 한국인들끼리 만든 회사인데도 해외에서 사업자 등록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정부 지원 사업자로 선정됐다가 탈락했다”며 “정부가 피부에 와 닿는 규제 타파 정책을 내놓지 않는 이상 많은 혁신 기업들이 빠른 속도로 한국을 빠져나갈 것”이라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도 지난달 27일 “정부의 규제 개혁안이 낙제 수준”이라며 예정됐던 ‘규제개혁 점검 회의’를 전격 취소했다. 청와대와 정부 내에서도 정부의 규제 혁신 의지가 미미하다는 것을 자인한 셈이다.

하선영 산업부 기자 dynamic@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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