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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리커창 “무역전쟁 동참하라” 삼성·현대차 “배터리 문제 풀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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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난달 29일 ‘한·중 고위급 기업인 대화’에 참석한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 윤부근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 회장(앞줄 왼쪽부터). [연합뉴스]

지난달 29일 ‘한·중 고위급 기업인 대화’에 참석한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 윤부근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 회장(앞줄 왼쪽부터). [연합뉴스]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가 한국 고위급 정·재계 인사들에게 “글로벌 보호무역주의를 극복하는 데 한국이 동참해 달라”고 말했다. 미국과 중국 간에 벌어지는 이른바 ‘무역전쟁’에서 한국이 중국 편에 서줄 것을 요청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에 대해 한국의 정·재계 인사들은 “통상 관련 한한령(限韓令)을 풀어 달라”고 요구했다.

한국 CEO-중국 정부 직접 소통 #리커창, 사실상 중국편 서달라 요청 #윤부근 “반도체 관련 공정 조사를” #정의선 “한국기업 차별은 안 된다” #‘롯데 매각’ 등 한한령 해제도 요구

리 총리의 요청은 지난달 29일 중국 베이징 세인트레지스 호텔에서 열린 ‘제1회 한·중 기업인 및 전직 정부 고위인사 대화’(기업인 대화) 직후 나왔다. 이 행사는 대한상공회의소와 중국국제경제교류센터(CCIEE)가 공동 주최했다.

리 총리는 이날 기업인과의 대화 이후 중난하이(中南海)에서 한국 측 참석자들을 따로 만나 미국과의 무역전쟁에서 공동 대응할 것을 요청했다. 리 총리는 “중국에는 ‘물에 가까운 누각에서 달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다(近水楼台先得月)’는 속담이 있다”며 “한국은 가까운 이웃”이라고 강조했다. 이웃 국가인 중국에 이익이 되는 일이 한국에도 좋다는 의미다.

한국 경제계를 향한 중국 측의 구애는 면담 전 진행된 기업인 대화 행사에서 분위기가 감지됐다. 비공개로 진행된 토론 세션에서 리샹양(李向陽) 중국사회과학원장은 “‘하늘이 무너지면 키 큰 사람이 먼저 맞는다’는 식으로 중·미 무역전쟁을 한발 떨어져 보는 건 잘못된 시각”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대미 무역 흑자액 비중은 중국이 가장 높지만 대미 무역에서 거둬들이는 부가가치를 따지면 다른 아시아 국가 비중이 상당한 만큼 중·미 무역전쟁에 아시아 각국의 이익이 걸려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리커창. [뉴시스]

리커창. [뉴시스]

보호무역주의를 앞세운 미국의 통상 정책이 중국만의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공동전선을 요구하는 중국의 메시지에 한국 기업인들은 한·중 통상 문제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윤부근 삼성전자 부회장은 “중국에서 이뤄지는 반도체 반독점 조사가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실시될 수 있도록 지원해 달라”고 포문을 열었다. 이어 “삼성은 중국 정부의 산업고도화 전략 방향에 부응해 5년간 반도체·배터리·디스플레이 등 첨단산업에 약 200억 달러를 투자하는 등 중국 개혁·개방 40년 이래 최대 규모의 외자기업 단일투자를 기록했다”며 “외자기업들이 위축되지 않고 과감히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윤 부회장이 반도체 문제를 꺼내자 행사장엔 미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지난 5월 중국 정부는 삼성전자 등 글로벌 반도체 3개사를 상대로 반독점 위반 조사에 착수한 바 있다. 업계에선 세계 최대 반도체 소비국인 중국이 반독점 위반 조사 카드를 꺼내들고 한국 반도체에 대한 가격 인하 압박에 나섰다고 분석한다.

한국산 전기차용 배터리만 보조금 지급에서 배제되는 문제도 거론됐다. 윤 부회장은 “2016년 이후 한국 제조사가 만든 배터리만 차별을 받으면서 삼성SDI가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조속히 보조금 문제가 해결돼 중국 내 배터리 사업을 조기 정상화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 달라”고 당부했다. 이어 “세계 최대 전기차 시장인 중국에 배터리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공장을 3곳이나 만들었지만 현재 생산 제품을 모두 중국 외 나라로 수출하는 실정”이라고 토로했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부회장은 “현대차는 중국 내에서 수소차 대중화에 기여하고 싶다”며 “현지업체와 파트너십을 맺고 경쟁하는 과정이 공정하게 진행되길 바란다. 한국산 배터리가 적용된 전기차도 차별없이 이용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추진 당시 협상을 총괄한 최석영 전 외교부 교섭대표는 통상 문제로 입장이 가장 곤혹스러운 롯데 문제를 거론했다. 최 대표는 토론 세션에서 중국 정·재계 인사들에게 “중국 상무부 허가가 지연돼 롯데가 중국 내 판매점을 매각하는 데 애먹고 있다”며 해결을 당부했다.

재계는 이번 행사가 중국 측에서 각별히 공을 들여온 자리인 만큼 현장에서 쏟아진 한국 측 재계의 요청을 중국이 외면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이날 행사에는 왕이(王毅) 외교부장의 후임자로 유력한 러위청(樂玉成) 부부장이 참석했고, 중국 측 위원장으로는 상하이방 출신 부총리를 역임한 국가 원로 쩡페이옌(曾培炎) CCIEE 이사장이 나섰다.

한국 측 위원장인 정세균 전 국회의장은 “중량감 있는 인물을 배치하고 리커창 총리가 직접 글로벌 스탠더드 등 자유무역을 약속했다”며 “이번 기회에 기업의 애로사항이 중국 최고위층에게 전달되면 한국 기업이 원하는 실질적인 후속 조치들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행사 실무를 지휘한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은 “경제 활성화를 위한 재계의 당면 과제가 양쪽 정부에 잘 전달될 수 있도록 양국 경제인 간의 대화의 밀도를 높여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측에선 정세균 전 의장이 위원장 자격으로 참석했고 노영민 주중대사,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 최태원 SK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부회장, 손경식 CJ 회장, 구자열 LS 회장,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 윤부근 삼성전자 부회장, 박진수 LG화학 부회장 등이 참석했다. 중국에서는 러위청 외교부 부부장, 쩡페이옌 CCIEE 이사장, 다이샹룽(戴相龍) 전 중국인민은행 총재, 다이허우량(戴厚良) 중국석유화공그룹 사장, 수인뱌오(舒印彪) 중국국가전력망공사 회장, 리둥성(李東生) TCL그룹 회장 등이 자리했다.

◆한·중 기업인 및 전직 정부 고위인사 대화

올해 처음 열린 ‘반관반민(半官半民)’ 성격의 경제협력 소통 채널. 두 나라에서 기업인, 전직 관료 등이 각각 16명씩 위원으로 참석한다. 2017년 12월 문재인 대통령 방중 동안 대한상의와 중국국제경제교류센터(CCIEE)가 MOU를 맺고 행사를 준비해 왔다. 2차 대화는 내년 서울에서 열린다.

베이징=이근평 기자 lee.keunp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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