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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트레티야코프의 상심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90호 04면

모스크바에 있는 국립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러시아 예술의 정수를 모아놓은 곳입니다. 19세기 거상(巨商)이었던 파벨 미하일로비치 트레티야코프(1832~1898)가 스물네 살이던 1856년부터 40년간 수집한 컬렉션이죠. 동생 세르게이가 수집한 유럽 작품들까지 합쳐 1892년 모스크바시에 기증했고 이듬해 ‘파벨과 세르게이 트레티야코프 형제 기념 모스크바 시립 미술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최근 이곳이 화제가 됐었죠. 지난달 25일 보드카에 취한 한 남성이 ‘국민 화가’ 일리야 레핀의 대표작 ‘1581년 11월 16일의 이반 뇌제(雷帝)와 아들’을 관람객 접근 방지용 금속 막대봉으로 훼손한 것입니다. 깨진 액자 유리 조각에 최소 3군데가 찢어졌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그림 속 황제의 얼굴과 손 부분은 손상되지 않았다고 하네요.

사실 이 그림은 검열에 걸린 최초의 작품이었습니다. 러시아 최초의 황제(차르)이자 폭군으로 이름난 이반 4세가 며느리의 옷차림을 문제 삼아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실화를 소재로 한 작품인데, 심기가 불편해진 알렉산드르 3세는 1885년 4월 1일 이 그림의 대중 전시를 금지시켰고, 트레티야코프는 따로 별채를 지어 소수의 관람객에게만 공개했습니다.

출장 중 짬을 내 찾아간 미술관, 작품이 걸려있던 자리에는 작품을 찍은 사진과 함께 “그림은 복원중입니다”라는 한 줄 설명 만이 관람객을 맞고 있었습니다. 부디 제 모습을 다시 찾을 수 있기를.

정형모 문화에디터  h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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