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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초 사당 상량식…200년만 퇴계·서애 조선유림 4인 위패 한자리에

중앙일보

입력

조선 대표 유림 4인 위패 한자리에…8월 초 사당 상량식 

경북 안동의 호계서원 복원 현장. [안동시, 공사 관계자]

경북 안동의 호계서원 복원 현장. [안동시, 공사 관계자]

'퇴계 이황·서애 류성룡·학봉 김성일·대산 이상정-.' 조선을 대표하는 유림(儒林) 4인이다. 이들의 위패를 한 자리에 봉인하는 사당 상량식이 8월 초 경북 안동에서 열린다. 이들 4인의 위패가 한 자리에 봉인되는 사당이 생기는 것은 국내에서 첫 사례다.

퇴계를 가운데 두고 윗자리인 왼쪽엔 서애를, 오른쪽엔 학봉을 모시기로 문중과 후학이 합의한 것이다. 학봉 영정은 청송군 항일의병기념관이 최근 제작한 것이다. 사진 왼쪽부터 서애 류성룡, 퇴계 이황, 학봉 김성일.[중앙포토]

퇴계를 가운데 두고 윗자리인 왼쪽엔 서애를, 오른쪽엔 학봉을 모시기로 문중과 후학이 합의한 것이다. 학봉 영정은 청송군 항일의병기념관이 최근 제작한 것이다. 사진 왼쪽부터 서애 류성룡, 퇴계 이황, 학봉 김성일.[중앙포토]

사당은 경북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호계서원(虎溪書院)에 있다. 호계서원은 지난 2월부터 45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복원 공사가 한창이다. 내년 상반기 완공을 목표로 8000여㎡ 부지에 사당(46㎡)을 중심으로 10여개 부속 채로 지어지고 있다.

8월 초 호계서원 사당 상량식 예정 #조선 대표 유림 4인 위패 한자리에

8월 초로 예정된 상량식에는 갓을 쓰고 도포를 걸친 퇴계·서애·학봉·대산의 문중과 후학들이 참석할 것으로 알려졌다. 위패가 봉인될 사당은 중국산 등 외국산이 아니라 국내산 소나무와 한식 기와를 이용해 지어진다.

이렇게 호계서원 사당에 조선을 대표하는 유림 4인의 위패가 한 번에 봉인되기는 쉽지 않았다. 꼬박 200여년이 걸렸다. 호계서원과 유림 4인을 둘러싸고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걸까.

경북 안동의 호계서원 복원 현장. [안동시, 공사 관계자]

경북 안동의 호계서원 복원 현장. [안동시, 공사 관계자]

이야기는 16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퇴계 이황의 위패를 봉인하는 최초의 호계서원(원래 이름은 여강서원)을 안동에 건립할 때다. 당시 호계서원 사당에 퇴계의 제자인 서애 류성룡(1542~1607)과 학봉 김성일(1538~1593) 중 누구의 위패를 윗자리인 퇴계 왼쪽에 놓는 게 맞는지를 두고 갈등이 있었다.

일부 유림은 영의정까지 지낸 서애가 윗자리인 퇴계 왼쪽에 와야 한다고 했고, 반대 측 유림은 나이가 네 살 많은 학봉이 와야 한다고 했다. 학봉은 관찰사를 지냈다.

경북 안동의 호계서원 복원 현장 조감도. [안동시, 공사 관계자]

경북 안동의 호계서원 복원 현장 조감도. [안동시, 공사 관계자]

안동의 한 유림은 "고서 등을 보면 당시 최초의 호계서원 사당엔 벼슬의 높낮이로 정해야 한다는 대학자들의 뜻에 맞춰 일단 퇴계를 중심으로 좌측 서애, 우측 학봉으로 위패가 봉인된 상태로 나온다. 위패를 이렇게 두고 갈등을 벌인 것으로 전해진다"고 설명했다.

본격적인 반목과 갈등은 1812년 불거졌다. 학봉의 후학들이 호계서원 사당에 영남학파의 대표 유학자인 대산 이상정(1711~81)의 위패를 추가로 봉인하자는 주장을 제기하면서다. 수면 아래에서 갈등하던 유림 사이에 반목은 공론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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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국정을 손에 쥐고 있던 흥선대원군이 중재를 시도할 정도였다. 1871년 흥선대원군은 유림 간 중재가 어렵자, 호계서원을 철폐했다.

위패없는 복원 공사 전에 있던 안동 호계서원. [중앙포토]

위패없는 복원 공사 전에 있던 안동 호계서원. [중앙포토]

유림의 반목은 최근까지 계속됐다. 서애파와 학봉파 간 서로 말도 잘 걸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른바 '병호시비(屛虎是非)'다. 오래전부터 서애파를 '병'파, 학봉파를 '호'파라고 불렀다고 한다. 병호시비는 이들간의 다툼이라는 의미다.

익명을 원한 한 학자는 "퇴계를 위한 서원을 두고, 병호시비가 생겼다. 이를 두고, '바람직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 일에 대해서는 묻어둬라. 말도 꺼내지 말라'는 말을 과거 척암 김도화 등 일부 유학자가 이야기 했을 만큼 내부적인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고 전해진다"고 했다.

1871년 사라진 호계서원은 이후 7년 뒤 위패를 봉인하는 사당 없이 단순히 서원 강당만 안동에 복원됐다. 그러다 안동댐 건설로 1973년 안동시 임하댐 아래로 옮겨 세워졌다. 이후 훼손이 우려돼 이전해 새로 복원해야 한다는 요구가 잇따라 지난 2013년 현재 호계서원 복원 공사 터로 옮겨 세워졌다.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지역 기록유산에 등재된 편액들이 보관된 한국국학진흥원 현판수장고 내부 모습. [중앙포토]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지역 기록유산에 등재된 편액들이 보관된 한국국학진흥원 현판수장고 내부 모습. [중앙포토]

영남 유림의 병호시비는 2013년 종지부를 찍었다. 경북도의 중재로 서애를 왼쪽에 놓되, 대산의 위패를 학봉 곁에 놓아 학봉을 받드는 모양새를 갖추는 것으로 합의가 이뤄지면서다. 이때 호계서원을 다시 위패를 봉인하는 사당까지 있는 온전한 상태로 복원하는 것에 대해서도 뜻을 모았다.

당시 길이 2m가량의 두루마리에 한문으로 쓴 합의문에 갓을 쓰고 도포를 걸친 유림이 모여 도장까지 찍었다고 한다. 조선을 대표하는 유림 4인의 위패가 봉인되는 사당이 생긴 배경이다.

안동에서 나고 자란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은 둘 다 퇴계의 수제자다. 학봉은 임진왜란 발발 전 통신 부사로 일본을 다녀왔으며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도 초유사로 적과 싸우던 중 병사했다.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으로 선조를 보필하며 국난을 극복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안동=김윤호 기자 youknow@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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