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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없는 날에는 불안하고 초조…경정·경륜 도박환자 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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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이 경륜장 근처에 있어 재미삼아 들렀던 김모(45)씨. 처음 적은 액수로 돈을 번 그는 '돈을 많이 걸면 더 딸 수 있다'는 생각에 점차 베팅 액수를 키워갔다.

그러나 마음 같지 않은 것이 도박의 속성. 경륜 도박 2년만에 그가 얻은 것은 신용카드 연체 빚을 포함해 1억원의 부채와 직장에서의 퇴직 권유였다. 최근 경륜.경정 상담치료실을 찾은 그는 아내의 이혼 요구에 전전긍긍하며,자살용으로 약을 가지고 다닌다고 했다.

도박중독도 '급수'가 있다. 승부가 빠르고, 베팅 액수가 크며, 예측이 불가능한 도박일수록 중독성이 더욱 강하다는 것. 경마가 대표적이다. 이 세 가지 요건을 잘 충족시킨다는 점에서 고스톱이나 로또에 견줄 바가 아니다.

경마에 이어 경륜과 경정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중독자도 덩달아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경륜의 경우 1995년 시작돼 관람객이 2차년도 3백30%, 3차년도 1백54%로 폭증했고, 현재 매년 평균 40%대의 성장세를 자랑(?)한다. 지난해 6백47만명이 다녀갔다. 지난해 발족한 경정 역시 인기를 끌며 올 8월 말 현재 76만여명이 참가할 정도로 고도성장을 예고한다.

강북삼성병원 정신과 신영철 교수는 "스릴이 강한 게임일수록 도박중독 성향이 강하다"며 "주5일 근무에 따라 환자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도박중독증에 빠지는 수순은 크게 다르지 않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몰라도 이렇게 따는 데 좀더 공부 하면 더 딸 수 있지 않을까' 또는 '잘만 하면 하루 일당은 빠지겠는 걸'하며 쉽게 시작한다는 것.

그러다 잃은 돈의 액수가 커지면서 본전 생각에 더 많은 시간과 돈을 바치게 된다. 이른바 중독이 심화되는 문제성 도박단계. 결국 이제는 대박을 터뜨리는 길밖에 없다는 절박한 심정에 사로잡히는 중독 고착단계(병적 도박)에 이른다.

자신의 의지대로 조절되지 않는 금단현상을 겪는 것도 이 단계의 특징. 도박을 하지 않으면 불안.초조하며, 신경질이 나지만 도박장 근처에만 가면 이런 증상이 사라진다.

경륜.경정 상담치료실의 이주성 심리상담사는 "교대근무자나 자영업자.택시기사와 같이 시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무심코 시작했다가 빠져든다"며 "상담실을 찾는 환자의 80% 이상이 이혼 또는 파산 직전의 중증"이라고 말했다.

다행히 도박중독자 치료율은 알코올 중독자보다 높다. 치료는 환자에 대한 평가 후 유형별로 나눠 인지행동치료와 약물치료, 그리고 치료 후에도 단도박 모임에 참가해 재발을 방지하는 순으로 진행된다.

신교수는 도박중독증에 빠지는 유형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한다. 첫째는 뇌에 충동을 담당하는 회로가 부실하거나 잘못 형성된 사람들이다. 일종의 뇌기능 장애환자.

둘째는 자극추구형이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일을 시작하면 뿌리를 뽑아야 직성이 풀린다. 일반적으로 가족력이 있고, 이런 성향이 어릴 때부터 나타난다.

셋째 현실도피형. 평소 우울하고 내성적이며 도박장에도 남몰래 혼자 간다. 전자의 경우엔 상담과 함께 알코올 중독에 사용하는 약물을, 후자엔 항우울제로 높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인지행동치료는 환자가 갖고 있는 생각과 행동을 바꿔주는 것. '도박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환상을 깨면서 무료하게 남는 시간의 이용계획을 짜주는 식이다.

가족들도 생각을 바꿔야 한다. 도박은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마약중독과 같은 뇌질환이다. 따라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반복해서 빚을 갚아주는 것은 마약을 공급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마지막 단계는 재발 방지다. 신교수는 "도박중독은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기 때문에 완치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며 "단도박 친목 모임(02-521-2141)과 같은 단체에 가입해 지속적으로 감시.견제하며, 스스로 의지를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종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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