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항공시장 개방이 성의표시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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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강갑생 기자 중앙일보 교통전문기자
강갑생 교통전문기자

강갑생 교통전문기자

“싸고 편하면 됐지 외국 항공사, 우리 항공사 따질 게 뭐 있나.” “지금은 싸지만, 독점이 되면 다시 요금을 올릴 것이다.”

아랍에미리트(UAE) 측 항공사들이 저가 공세로 우리 항공시장을 공략하고 있는 데다 최근 운항 횟수를 2배로 늘려 달라고 한국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는 기사가 나간 뒤 네티즌 사이에선 갑론을박이 오갔다.

상당수는 저렴한 항공권을 택하는 게 당연하며 굳이 어느 나라 항공인지 따질 이유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마트에서 여러 유사한 상품 중에서 하나를 고르듯 ‘가성비(가격 대비 만족도)’가 좋은 항공권을 구매하면 된다는 얘기다. 대한항공 오너 일가에 대한 국민적 분노도 한몫하는 모양새였다. 소비자 입장만 보면 타당한 얘기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그런데 앞서 중동 항공사와 경쟁한 외국 사례를 보면 상황이 단순하지 않다. 호주의 콴타스항공은 여러 유럽 노선을 뛰던 유명 항공사였지만 지금은 런던 노선 하나만 남아있다. 유럽연합(EU)에서는 항공 관련 일자리 8만개가 사라졌다. 전 세계 항공 시장을 주도해온 미국의 대형 항공사들까지 중동 항공사의 저가 공세에 위기감을 표하고 있다.

우리 시장도 많이 잠식됐다. 지난해 UAE와 한국 간 승객은 65만명이다. UAE 측 항공이 53만명을 태웠다. 이 중 양국 간 직항승객은 10만명이 조금 넘고 나머지는 모두 유럽·아프리카로 가는 환승객이다. UAE 측이 추가 증편 요구에서 겨냥한 것이 바로 우리의 유럽행 승객이다. 요구대로 된다면 우리 측 유럽 노선은 큰 타격을 피할 수 없다.

항공사가 더 어려워지면 일자리가 줄어든다. 주 7회 운항하는 노선 한 개가 폐쇄되면 1500~1900개의 일자리가 사라진다고 한다. 그런데 정부 일각에선 한때 갈등설이 불거졌던 UAE에 최소한의 ‘성의 표시’를 해야 한다며 증편을 주장한다고 한다. 한 항공사 간부는 “과거 원전을 수주한다고 중동 항공사에 문을 열어주더니, 이번에는 별 반대급부도 없는데 또 열겠다는 것이냐”며 “항공시장은 한번 무너지면 피해가 장기간 지속된다”고 말했다.

우리 항공사를 위해 중동 항공사를 쫓아내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문을 더 여는 건 신중하자는 얘기다. 자칫 성의 표시만 앞세우다 다른 나라의 전철을 밟지 말자는 거다. 극심한 취업난 속에 일자리를 더 만들기는커녕 그나마 있는 좋은 일자리마저 사라지게 하는 우(愚)는 범하지 말길 바란다.

강갑생 교통전문기자